[김승웅 휴먼칼럼] 다리(橋)에 관하여

추석날 나는 공원에 갔다. 집 근처 아파트 단지안에 있는 파리공원이다. 파리공원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아니면 공원에서 「세상 모르고 노는」 아파트 꼬마들 때문일까. 공원에서 반나절을 딩구는 동안 나는 파리특파원 시절 만났던 취재원 한 사람을 기억속에서 찾아냈다. 그를 내 소년 시절의 「켄터키 옛집」으로 초대했다. 문제의 취재원은 바다세프 크리스토. 불가리아계 미국인 전위 예술가로 지난 85년 파리 퐁 뇌프(Pont Neuf) 다리 전체를 황금색 천으로 칭칭 감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장본인이다. 퐁 뇌프 다리는 새롭다(Neuf)는 다리 이름과는 달리 파리 센강을 가로지르는 20여개의 다리 가운데 가장 먼저 지은 낡은 다리다. 그가 인근에 있는 화려한 알렉산더3세 다리 또는 시인 아폴리네르의 싯귀로 유명한 미라보 다리를 놔두고 하필이면 낡은 다리 퐁 뇌프를 골라 칭칭 감은 이유를 나는 지금껏 모른다. 이런 궁금증은 그러나 훗날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의 히트로 다리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나서의 의문일 뿐 당시 나의 주요 관심은 그가 왜 다리를 감으려 들었는지, 또 다리 하나가 감기는 것과 도시 미학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쏠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다리가 황금천으로 감기고 나면 『이제 파리가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유쾌히 떠벌리던 그의 예언이 적중했던 것도 놀랍다. 황금천으로 감긴 퐁 뇌프의 장관에 전세계가 기립박수를 보낸 것이다. 특히 아침햇살과 석양의 낙조에 불타는 다리의 모습은 동양기자의 눈에도 불타는 신전처럼 황홀했다. 현란한 금각(金閣)을 몽상속에 그리다 결국 절을 송두리째 불사른 일본 동승(童僧)의 심사도 저러했으리라. 다리의 장관을 구경하려는 차량행렬로 파리가 근 한달간 교통대란에 빠졌다. 다리 하나가 황금천에 감김으로써 다른 스무개의 다리들이 화들짝 기지개를 켠 것이다. 다리의 눈부신 변신으로 센강이 놀라고 또 그강이 적셔 온 파리가 하루 아침에 모습을 달리했다. 다리의 위력은 그 후 나를 무겁게 눌러 왔다. 도시에서 다리가 차지하는 역할은 단지 강의 양안(兩岸)을 잇는다는 물리적 역할로 그치지 않는다. 다리로 해서 그 도시의 정체(正體)가, 도시의 기운이 되살아 나고 시민들 모두가 알게 모르게 다리의 문화속에 얹혀 산다는 확신으로 까지 발전했다. 유럽을 배경으로 찍은 명화(名畵)의 현장을 취재, 한국일보에 장기 연재를 시작했을 때 그 시리즈의 첫탄을 「애수(哀愁)」로 고른 것도 그 영화의 원제 「워털루 다리(Waterloo Bridge)」 때문이었다. 또 영화속의 로버트 테일러가 안개속에서 비비안 리를 회상하던 감동의 다리 현장이 그곳 워털루 다리가 아닌 할리우드의 세트라는 것을 현장에 와서야 알고 나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까짓 세트면 어쩌랴, 다리 문화는 모든 걸 다 흡수하고 용서받게 마련인 것을. 또 동서양을 가르는 도시 이스탄불의 실제 동서 접점이 바로 보스포루스 해협위의 걸쳐진 다리임을 현지에서 확인했을 때의 감동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보면 내 소년 시절의 슬픈 추억 역시 다리와 걸려 있다. 6·25가 나던 다음해, 나는 지방에 있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추석 전날 나는 학교를 살짝 빠져 나와 추석 대목의 장이 서있는 다리 위에 누나와 함께 있었다. 삶은 콩깍지다발을 팔기 위해서다. 그때 나의 담임 여선생님이 다리 위에 나타났다. 지금껏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눈매가 몹시 고운 미혼 선생님이었다. 같은 학교의 상급생이던 누나는 기겁을 하고 도망쳤고 나만 덩그러니 남은 채 할 수 없이 인사를 했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선생님은 날더러 콩다발을 들고 따라 오라 명령했다. 수업을 빼먹은 죄도 있고 해서 나는 도망치지 않고 따라 나섰다. 선생님은 학교 쪽으로 가지 않고 시내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당시 일본식으로 지은 멋진 자택 앞에 서더니 콩다발을 내려 놓게 한 후 돈을 주셨다. 콩값보다 두 배나 되는 돈이었다. 순간 목젖이 뜨거웠으나 결코 울지는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누나한테 돈을 전하며 자초지종을 말하고 비밀로 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누나는 약속을 깼다. 추석날 아침 내가 번 돈으로 차려진 밥상 앞에서 사실을 말해버린 것이다.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리는 알고 보면 진작부터 내 삶속에 깊은 교각을 박고 있었던 것이다. 퐁 뇌프의 감동이 왜 그토록 절실했는지를 추석날 파리공원에 와서 그리고 거기서 내 소년 시절과는 달리 다리 위에 「세상을 모르고 노는」 꼬마들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언론인> <<영*화 '네/고/시/에/이/터' 애/독/자/무/료/시/사/회 1,000명 초대(호암아트홀) 텔콤 ☎700-9001(77번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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