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클래스 300 기업'의 선정 및 사후 관리의 부실 논란이 거세지면서 방치할 경우 '제2의 모뉴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2일 중소기업계에 따르면 심사위원 선정과 후보 기업 윤리성 검증이 부실하게 추진되는 것을 비롯해 선정 기업에 대한 사후 점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불법 브로커에게 서류를 맡기는 관행이 팽배한 데다 중간 점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면서 업체 당 수십 억원에 달하는 국고가 새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선 지원 서류를 대신 작성해주는 불법 브로커 시장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울경제신문 취재 결과 확인됐다. 업계에 따르면 서류 작성 단계에서 1,000만 원에서 최대 1억 원에 달하는 컨설팅 비용을 요구하는 브로커 시장이 활개를 치고 있는 상황. 2년 전 선정된 업체의 한 관계자는 "월드클래스 사업에 지원한다고 하니 대형 회계법인에서 지원 합격을 보장하며 1억 원을 컨설팅 비용으로 제안했다"며 "감당하기 쉽지 않은 금액이라 중소 컨설팅사에 1,000만 원을 주고 컨설팅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서류 심사에 통과한 후 사업성을 평가하는 2차 면접 단계에서는 심사에 참여하는 평가위원들의 전문성 여부가 도마 위에 올랐다. 기술 트렌드 변화를 반영한 전문가 인력풀이 구축되지 않아 후보 기업들의 기술을 정확하게 심사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특히 R&D 평가 시 기술 전문가 인력풀을 의존하는 SMTECH의 경우 가입한 전문가가 약 8,700명이지만 기계 등 특정 분야에 전문가가 몰려 있어 세부적 산업별 전문가가 충분하지 않고 이마저도 스스로 가입하는 구조라 전문성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올해 월드클래스 300에 선정된 기업의 한 임원은 "면접 단계에서 우리 회사가 개발한 기술에 대한 설명에 나섰지만 심사에 참여한 전문가 중에서 우리 기술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유명무실한 중간 점검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에 따르면 월드클래스 선정 기업에 대한 중간 점검은 연구개발(R&D) 과제에 대한 연차 평가와 기술·투자·수출·경영 등 총괄 부문에 중간 평가(격년마다 진행)로 나뉜다. R&D 과제 점검의 경우 국내외 특허 획득 등 형식적인 지표에 치중하면서 해외 수요자 인증 획득 등 질적 평가는 등한시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12년 R&D 과제에 선정된 기업의 2013년도 R&D 평균 집약도(매출액 대비 R&D 투자액)는 전년 대비 0.5%포인트 감소했고, 2013년 선정된 기업 역시 선정 이후 첫해인 지난해 0.1%포인트 줄어든 것으로 확인됐다. 거액의 예산이 직접 지원되는 만큼 R&D 집약도가 늘어나는 게 당연하지만, 자체적인 R&D 투자는 줄였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월드클래스' 선정 및 관리를 총괄하는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정부 규정에 따라 철저하게 중간 점검을 진행하고 있으며, 오히려 월드클래스 선정 기업에 대해서는 특별히 사전 심사까지 추가해 일반 R&D 사업보다 점검을 강화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R&D 과제 수행을 평가하는 '연차 평가'에서 KIAT 직원들이 '간사'라는 직함으로 민간 기술위원들과 함께 현장 실사에 참여하지만, 이 또한 부실 논란이 일고 있다. 월드클래스 행정 업무를 지원하는 KIAT R&D팀 전체 직원은 5명(인턴 1명 포함), 이 가운데 월드클래스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은 2명에 불과해 180여 개에 달하는 기업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제2의 모뉴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도덕성 검증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새정치민주연합 부좌현 의원실에 따르면 중기청이 올해부터 적용한 도덕성 검증 대책은 면접 시 최고경영자(CEO)의 경영철학 및 윤리경영 의지 항목 추가, 내부직원 만족도 조사 반영, 상생 협력 유도를 위한 윤리경영 조항 신설 등이다. 이영달 동국대 교수는 "공공의 재원이 대규모 투입되는 사업에는 투명성 서약을 의무화하고 있는 미국처럼 우리도 투명성 서약을 도입하는 등 적극적 개념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처럼 선정 과정부터 기업 관리까지 총체적인 부실 논란이 일자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영달 동국대 교수는 "미국처럼 공적 지원 프로젝트 선정 과정을 모두 공개하면 공정한 선발은 물론 음성적인 컨설팅 시장이 상당 부분 사라지면서 선의의 기업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영주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후 점검 강화를 통해 옥석을 가려내 글로벌 진출 의지가 있는 기업에 기술개발과 해외마케팅 등의 지원이 집중 투입되는 구조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 월드클래스 300이란?
성장 의지와 잠재력을 갖춘 중견·중소기업에 기술 지원, 시장 개척 등을 집중 지원해 2020년까지 세계적인 기업 300개를 키우겠다는 중장기 프로젝트로, 올해 선정된 30개 기업을 포함해 지난 2011년부터 현재까지 총 183개사가 선정돼 있다. 2011년 산업부에서 시작해 2013년 중기청으로 이관된 이 사업은 3~5년간 연간 최대 15억 원의 R&D 지원, 최장 5년간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연간 1.4억원 지원 등 18개 기관에서 21개의 시책을 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