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3월 10일] 허술한 자본시장법

“이럴 줄 알았다면 자본시장법이 시행되기 전에 미리 ‘공(空)펀드’라도 만들어둬야 하는 건데….” 한 대형 자산운용사의 상품기획 담당자는 자본시장법이 시행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새로운 펀드를 선보이지도 못했다. 이 회사만 그런 게 아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아직까지 자본시장법에 의거해 개발된 펀드는 하나도 없다. 법 시행 초기의 혼선 때문이다. 법 시행 3개월 이내에 기존 펀드를 새 법에 따라 모두 재등록해야 하기 때문에 금융감독당국과 자산운용사는 큰 혼란을 겪고 있다. 펀드 신고서 양식도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데다 펀드 이름에 대한 규정조차 최근에야 확정됐다. 약 3,000여개에 달하는 공모펀드에 대해 재등록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금융감독원이나 자산운용사 관계자들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있다. 법 시행 초기의 혼선을 예견한 ‘눈치 빠른’ 상품기획자들은 자본시장법이 시행되기 전에 ‘공(空)펀드’를 미리 만들어놓았다. 실제 자금 모집은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기존법(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으로 껍데기 펀드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자본시장법 시행에 힘입어 창의적인 금융상품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깨지고 말았다. 자산운용사들이 ‘자본시장법 1호 펀드’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서로 눈치보기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규제를 풀어도 붕어빵 펀드가 나온다면 비판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준비 부족은 펀드뿐 아니라 곳곳에서 드러난다. 표준투자권유 준칙, 펀드판매인력 자격증 시험 등 법이 바뀌면서 달라져야 할 각종 제도와 인프라가 법 시행 이후 정비되고 있다. 먼저 법부터 시행한 후 안되겠다 싶으면 유예기간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여전하다. 자본시장법 시행일이 지난 2009년 2월4일로 확정된 게 어언 2년 전의 일이다. 자본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법이라고 해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고도 탈이 나지 않는다면 모든 일을 ‘빨리빨리’ 정신으로 해낼 수 있는 한국인의 DNA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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