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3월31일] 유대인 추방령

‘빈부귀천ㆍ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떠나라.’ 1492년 3월31일, 스페인이 내린 유대인 추방령(알함브라 칙령)의 골자다. 시한은 7월.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유대인 유랑사의 비극으로 꼽히는 이 사건은 세계경제의 흐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추방령의 명분은 종교. ‘가톨릭 신앙의 해악인 유대인을 쫓아낸다’는 구실은 연초 이슬람을 물리친 기사들에게 줄 땅과 재화를 유대인에게서 빼앗기 위함이었다. ‘자유롭게 재산을 처분하되 금과 은ㆍ화폐 등은 반출할 수 없다’는 단서조항은 추방령의 의도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유대인 추방은 경제를 뒤흔들었다. 15만여명(65만명 설도 있다)의 유대인은 땅과 집, 금과 은, 화폐를 헐값에 내놓고 반출이 가능한 옷가지나 식량을 사들였다. 물가가 오를 수밖에. 물가 상승은 16세기 이후 스페인을 내내 괴롭혔다. 유대인이 맡아온 전문인력 부족은 더 큰 재앙이었다. 스페인은 농업을 담당해온 아랍인까지 추방해버렸다. 자본과 생산을 모두 버린 셈이다. 신대륙에서 강탈한 막대한 금과 은을 갖고도 2류 국가로 전락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스페인에 정착했던 유대인, 즉 세파르딤(Sephardim)의 30%는 이때 굶어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살아남은 자들의 주류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에 자리잡았다. 경제학자 리카도, 영국 총리를 지낸 벤자민 디즈레일리 등의 조상이 이런 경로를 밟은 사람들이다. 세계 최강국이 스페인-네덜란드-영국-미국으로 이어진 과정은 유대인의 이동과 맥을 같이 한다. 지구촌 경제를 주무르는 유대인의 성공에는 당시의 한과 맹세가 서려 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이날을 결코 잊지 않겠다.’ 오늘날 팔레스타인도 똑같이 절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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