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첫날인 지난 3일 평양시 창광거리에서 단발머리로 멋을 부린 북한의 한 여성이 여성 교통안전 보안원의 옆을 지나가고 있다. /평양=청와대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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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첫날인 지난 3일 평양시 창광거리에서 단발머리로 멋을 부린 북한의 한 여성이 여성 교통안전 보안원의 옆을 지나가고 있다. /평양=청와대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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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10월6일 이후 4년 만에 다시 찾은 평양. 10월2일 평양 하늘은 흐렸다. 7년 만에 찾아오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연도에 수십만명의 군중이 집결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 그들은 심드렁했다. 널브러진 널판때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들의 얼굴은 무심했다. 그들이 손에 든 선분홍색의 꽃술도 시들어만 보였다. ‘서울도 울고 평양도 울었다’는 7년 전 신문의 제목을 머릿속에 담고 설렘을 맛보려던 기자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지만 그들은 1시간 후 노 대통령이 무개차를 타고 평양 시내에 들어올 때는 ‘통일’ 등을 연호하면서 환호하는 모습으로 돌변했고 우리 국민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투영되는 화려한 모습을 그대로 믿었고 아직도 그렇게 알고 있다.)
낮12시2분. 영접 장소인 ‘4ㆍ25문화회관’에 7분여 일찍 도착해 기다리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상봉. 김 위원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발짝 다가온 노 대통령에게 그는 작은 미소와 함께 한 손만을 내밀었다. 그리고 수행원 인사와 군대의 분열이 이어지는 내내 김 위원장은 무표정했다. 30m 앞에서 바라본 김 위원장은 잔뜩 팬 주름살만큼이나 뭔가에 잔뜩 골이 난 표정이었다. ‘역사적인 만남’이라면서 오랜 시간 기다렸던 남북 정상의 첫 상봉은 찌푸린 날씨만큼이나 ‘절망’적이었다. 후~. (노 대통령은 귀국 후 도라산역 보고회에서 “첫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첫 회담을 가진 후 눈앞이 깜깜했고 잠이 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우리 취재단의 숙소인 평양 창광 거리 고려호텔. 정상회담 취재진은 오후 내내 양 정상 간 또 한번의 만남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결과는 허망함뿐이었다. 평양에 오기 전 “김 위원장이 평양 초입인 3대혁명기념탑에 마중 나올 수 있다” “환영 만찬장에 올 수 있다”는 등의 모든 보도들은 ‘오보’로 끝나고 말았다.
오후7시에 시작된 만찬. 기자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북측 내각(우리의 재정경제부와 같은 곳)의 핵심 인사는 이런 기자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이번 회담의 가장 큰 주제였던 ‘남북 경제공동체’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그는 “그동안 경협이 (큰 진전 없이) 말로만 이뤄지지 않았느냐”며 쏘아붙였다. 그는 “저임금에 기초한 노동집약적 산업이 아니라 고부가가치의 첨단공장을 설립해달라”면서 “(고부가가치 공장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무거운 마음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오전10시30분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참관’ 행사에서 만난 특별수행원들의 발언은 노 대통령의 표현대로 눈 앞을 깜깜하게 했다. 한 재벌 총수는 경협 등 이번 회담에 대한 질문에 “몸만 따라다니지…”라며 퉁명스러운 답변을 했다. ‘경협은 쉽게 되겠지’라며 잔뜩 기대를 품었던 기자의 가슴은 턱 막히고 말았고 이는 이어진 오찬에서 노 대통령이 밝힌 ‘벽’이란 단어로 현실화했다. 총수들은 급기야 오후 참관 행사였던 ‘3대혁명전시관 중공업관’의 참관을 포기하고 말았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귀국 후 브리핑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3일 오전 회담에서 경협 확대에 부정적이었다”고 전했다.)
계속되는 절망감, 기자의 가슴은 타들어갔다. 비록 취재단의 일부로 참여했다지만 정상회담의 성공적 마무리를 그 누구보다 원했기에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라는 암담함까지 엄습했다. 오후8시에 시작된 ‘아리랑’ 공연 마지막 부분에서 ‘무궁 번영하라, 김일성 조선이여’라는 부분에서 노 대통령이 기립박수를 하는 순간에는 “북에 왜 와야 했나”라는 회의감마저 느꼈다.
마지막 날. 햇살은 아침부터 따가웠다. 기자는 오전8시 몇 명의 기자들과 함께 이날 노 대통령의 참관지였던 남포로 향했다. 평양 외곽은 추수가 막 시작된 듯했다. 1980년대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볏단을 쌓아놓은 모습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평화자동차를 거쳐 2시간 넘게 달린 후 드러난 양수리 배 수리공장과 연이어 나타난 8㎞의 대규모 방조제. 아산만 못지않은 거대한 방조제가 위용을 드러냈다. 북측 안내원은 “(김정일) 장군님의 위대한 업적”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서해갑문 기념탑에 올라 남포항을 바라본 순간 기자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곧이어 도착한 노 대통령이 환한 얼굴로 대기업 총수들과 사진을 찍는 순간, 기자는 멀리서 들리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전날까지 가슴을 턱 막았던 멍울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공식수행원으로 따라온 권오규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의 얼굴에도 연신 웃음이 피어났고 “오후 발표될 공동선언문에 뭔가 담기겠구나”라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공동선언문이 발표되던 오후1시3분. 선언문 내용을 보는 순간 기자는 약간의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렘과 흥분으로 보냈던 오전 시간, 기자는 선언문의 핵심 사항 가운데 하나였던 조선소 설립 부지를 보고 있었던 셈이다. 선언문을 보면서 프레스센터에 모인 기자들의 박수 속에 기자는 ‘조선소’라는 단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후5시6분. 또다시 천리마 거리에 몰려든 수십만명의 평양 시민을 뒤로 한 채 3대혁명기념탑을 빠져나오는 순간, 기자의 가슴은 기대로 부풀어올랐다. 첫날 잿빛의 암울함은 비로소 희망으로 변했다. 잔뜩 찌푸렸던 평양 시내에 밝은 햇살이 내리쬐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으로 물들여 있었다.
확~달라진 평양
창광거리에 고층건물 빼곡 아파트는 파란색으로 도색
네온사인 불빛에 야경 화려 4년전과 너무 달라 어리둥절
4년 만에 다시 방문한 평양이 모습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도시는 밝아졌고 한층 환해졌다.
방북 첫날인 2일 오전11시50분. '정주영 체육관'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묵었던 고려호텔을 다시 찾은 기자는 순간 놀라움을 맛봐야 했다. 호텔이 위치한 청광거리 앞에는 고층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고 한결같이 연분홍의 파스텔톤 색깔들이 덧칠해져 있었다. 호텔 앞 건물들은 비약하자면 '북한판 타워팰리스'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북한 안내원들은 그곳 아파트들의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한 인사는 당 간부들이 사는 곳이라고 언질했다). 4년 전 색칠 없이 시멘트 빛깔로만 얼룩져 '유령 아파트'를 연상하게 했던 아파트도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기자의 놀라움은 밤이 되자 더해갔다. 4년 전 기자는 평양의 밤하늘을 보면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 평양 시내는 전기가 없어 암흑으로 뒤덮였고 지나가는 차량은 1시간 동안 10대가 채 되지 않았다. 10월2일 밤. 북측의 환영식에 가기 위해 도로를 달리던 기자는 많은 건물들에서 뿜어나오는 네온사인과 아파트들에 일제히 켜진 형광 불빛들을 먼저 바라보게 됐다. 정상회담을 축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켜진 것이기는 하겠지만 나무들에는 오색 불빛의 트리들이 설치돼 있었고 소설가 조정래씨는 이를 두고 '10월의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감탄사를 읊었다. 기자의 놀라움은 자정 평양 시내를 바라보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암흑이었던 평양 시내 아파트들에는 여전히 불빛이 가득했다.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 기자는 특별수행원 가운데 방북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인상을 물어봤고 답은 기자와 같았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많이 바뀌었죠. 도시가 많이 환해진 것같아요… 돈이 들어와서 그런 것 같아요"라며 웃음을 띠었고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많이 깨끗해지고 정돈됐다. 지난 2000년에도 수행원으로 따라왔는데 그때는 이렇지 않았다. (건물들에) 색칠도 많이 하고. 버스도 많아졌다. 가로등도 없어졌는데 생겼더라"며 약간의 흥분을 드러냈다.
정상회담을 통한 남북 경제공동체의 개막. 4년 뒤 평양을 다시 찾는다면 그때는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