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토종 종자 산업이 초토화됐다. 국내 5대 종자 기업 가운데 네 곳(청원·서울·흥농·중앙종)이 글로벌 거대 종자 기업의 먹잇감이 돼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이 바람에 토종 업체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35%까지 뚝 떨어졌다. 외국 기업에 맥을 못 추던 국내 기업은 2007년이 돼서야 시장점유율 측면에서 외국계 기업을 다시 압도할 수 있었다. 정부의 종자 산업 육성책과 농우바이오·동부팜한농 등 국내 업체의 성장으로 지난해 기준 시장점유율은 단 한 번도 후진하지 않고 지난해 89%까지 증가했다.
종자 경쟁력을 되찾아온 지 10년도 안 돼 당시의 위기가 재연될 조짐이다. 국내 2위 종자 업체 동부팜한농이 외국계 자본에 매각될 가능성이 커지면서다. 대형 종자 업체가 외국계에 넘어갈 위기를 맞으면서 정부가 2013년부터 민·관 합동으로 4,900억원을 투입해 2021년까지 외산 종자를 대체하겠다는 '골든시드프로젝트(GSP)'도 가동 2년여 만에 흔들릴 처지다. 시장 개방으로 외산 곡물과 채소·과일이 쏟아지는 가운데 농업의 근본인 종자 산업마저 흔들리면 국가의 식량 주권에 심각한 타격이 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투자(IB) 업계 관계자는 17일 "동부팜한농의 구원투수로 거론되던 농협경제지주가 동부팜한농 인수 검토를 완전히 접었다"며 "일본 오릭스프라이빗에쿼티(PE)가 가장 유력한 인수 후보"라고 전했다. 동부팜한농은 지난 3월 동부그룹에서 계열 분리돼 경영권이 국내 사모펀드 손으로 넘어간 상태다.
동부팜한농이 우려한 대로 일본계로 넘어가면 국내 업체의 시장점유율은 70%까지 내려간다. 토종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하락하는 것은 1997년 이후 처음이다. 동부팜한농(18%)과 사카타코리아(7%)의 점유율을 합치면 25%로 일본 종자 업체가 국내 시장의 4분1을 장악하게 되는 셈이다.
동부팜한농이 오릭스PE에 넘어가면 2012년 세계 최대 종자 업체 몬산토코리아에서 찾아온 불암배추·삼복꿀수박·관동무에 더해 조선오이로 불리는 백다다기오이 개량종 등 600여종이 넘는 대한 토종 품종 보호권이 일본으로 이전된다. 몬산토코리아로 소유권이 넘어간 청양고추처럼 앞으로 다른 토종 채소 종자도 일본에서 사들여와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오릭스가 기업 인수합병(M&A) 후 매각을 전문으로 하는 금융자본이라 우려는 더 크다. 확보한 종자의 품종 보호권을 다른 업체에 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IMF 구제금융 때 토종 종자를 대거 잃었던 악몽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얘기다.
김수석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글로벌 기업은 한국을 떠나 더 큰 시장인 중국과 인도로 옮겨가고 있다"며 "토종 종자의 소유권을 가진 기업이 해외에 있으면 수입해서 들여와야 한다"고 설명했다.
종자 주권을 위협하는 것은 외국 자본만이 아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맺은 자유무역협정(FTA)도 발목을 잡을 수 있다. FTA 체결국이 정부 주도로 개발한 국산 품종을 농가에 보급, 해외 품종을 밀어내는 토종 종자 육성(GSP) 정책을 FTA 경쟁 협정 위반으로 삼을 여지가 다분하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위원은 "FTA 체결국이 수출 보조금이 아닌 농업 보조금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며 "미국이 유럽연합(EU)과의 FTA 과정 중 프랑스와 스페인의 농업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종자 주권을 지키려면 자율적인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으로 토종 기업의 덩치를 키워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새로 개발한 종자로 수입 품종을 대체하고 나아가 수출까지 늘려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 연구위원은 "경쟁력이 없는 업체를 묶어 협업체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글로벌 기업에 맞설 특수 품종을 개발해 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