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Life] 서양화가 최동열

숨겨진 삶의 근원 그리고 싶어 히말라야에 왔죠
베트남전서 쓰라린 인생체험 미국선 술·마약 빠져 나락으로
화가 아내 만나면서 그림에 영감 '한국의 고갱' 이라는 별명 얻어
내 모든 것 던져 도전하면 결국 원하는 것 얻는 게 인생



"'끈질기게 낭떠러지로 뛰어내려라, 낙하산은 떨어지면서 만들게 돼 있다.' 어느 과학소설가의 말입니다. 젊은 시절 우연찮게 접한 이 주문은 내 인생의 모토가 됐어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던져 도전하면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고갱'이라 불리는 재미화가 최동열(63·사진) 화백의 일명 '낭떠러지 철학'이다. 베트남전 첩보대원으로서의 활동, 술과 마약에 빠져 지냈던 미국 플로리다 생활 등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아온 그에게는 '보헤미안(Bohemian·방랑자)'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파리에서 명성을 쌓은 후 타히티에 매료됐던 후기인상파의 거장 폴 고갱처럼 멕시코 유카탄, 히말라야 등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대통령을 꿈꾸던 소년, 거친 세상을 만나다=최 화백은 6·25전쟁 이듬해인 1951년 피난통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국은 그에게 대통령이라는 꿈을 안겨 줬다. 그의 원대한 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이는 다름 아닌 친할아버지였다. 1994년 갑신정변의 시발점이 된 우정국 사건 후 일본으로 건너가 관서대 법대를 졸업했고 3·1 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을 변호했던 우리나라 초대 변호사이기도 한 최진 변호사가 바로 그의 조부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부모님께 들었던 할아버지의 삶은 제게 큰 가르침이었어요. 일제강점기 수탈의 상징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의 변호를 맡고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투사를 위한 일에도 물불을 안 가리셨다고 하더군요. 납북된 후에는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어린 제게도 할아버지의 삶은 피폐한 우리나라를 위해 정치를 해야겠다는 막연한 결심을 하게 만든 셈이지요."

부모님을 따라 상경해 경기중학교에 들어간 최 화백은 비평준화 시절 최고의 명문이었던 경기고 진학을 위해 시험을 봤다. 하지만 결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낙방이었다. 인생 첫 번째 실패에 큰 충격을 받은 화백은 일반고 진학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1967년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당시 베트남 전쟁으로 국내외가 어수선한 시절이라 베트남어에 관심이 가더군요. 외국에 대한 묘한 동경 같은 것도 작용했고요. 친구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저는 대학생이 된 셈이었는데 1년 지나니 대학 생활도 싫증이 나더군요. 그래서 군 입대가 가능한 나이인 만 16세가 되던 대학 2학년 때 해병대에 지원했어요."

군 생활 일 년 후 베트남 전쟁 첩보대원으로 지원해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의 부패, 인간의 잔인함, 전쟁 중에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는 사람들 등 많은 것을 목격하고 체험하게 된다.

"베트남어를 할 줄 아니까 포로 심문을 자주 맡았는데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보다 그런 게 더욱 힘들더군요. 그들을 속이고 회유하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뽑아내고 필요 없어지면 죽이기도 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미국에서의 방랑, 그 끝에서 예술과 조우하다=군에서 제대한 후 1972년 교환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전쟁을 겪은 그에게 대학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질감이 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결국 공부를 그만뒀어요. 그냥 방탕하게 미국 생활을 했죠. 한국인들이 많은 LA가 아닌 미국의 동남부 지역에 있었는데 플로리다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유도와 태권도 사범을 하기도 했고 술집 문지기, 바텐더 등을 하면서 술과 마약에 빠져 밑바닥 인생을 살아봤습니다."

그러다 1977년 뉴올리언스에서 지금의 아내이자 화가인 엘디(LD 로렌스)를 만났다.

재즈의 고장인 뉴올리언스는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찾아간 한국 청년에게 많은 영향을 줬고 그는 영시를 지어 당시 연애 중이던 엘디에게 읽어줬다고 한다. 어느 날 엘디 옆에서 붓글씨 연습(화백은 미국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붓과 벼루 등을 챙겨다녔다고 한다)을 하다가 갑자기 어렸을 적 반 고흐와 폴 고갱을 동경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싸는 종이를 한 통 사와 100m나 되는 종이 위에 뛰는 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1978년 말의 해였어요. 붓에다 먹을 묻혀 말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미칠 것처럼 어떤 열정에 사로잡혀 수백 마리를 그려갔던 겁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마음에 드는 말 그림이 두어 개 나왔지요."

말 그림을 시작으로 미술계에 입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술의 혼을 찾아 떠돌아다니다=최 화백은 뉴올리언스를 떠나 멕시코와 미국 서부 남부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문명과 부딪치지 않는 원시적인 수렵생활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완성한 작품들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미술계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예술가의 존재 의미를 찾아 방황했다고 한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오랜 방황 끝에 문명이 없는 자연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뉴욕을 떠나 인적이 없는 멕시코 유카탄 코바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진정한 자신'을 되찾으면서 신들린 무당처럼 작업에 전념해 풍성한 대작을 완성한다. 1985년 그간 작업했던 대작들을 갖고 세계적인 작가들이 모여 있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서 전시하면서 '신표현주의 작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때 얻게 된 별명이 바로 '한국의 고갱'이다. 이후 국내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대형 화랑에서 초대전을 열어줄 정도였다.

미술계에 알려진 후 1987년 15년 만에 서울로 금의환향한다. 그 시절 화두가 됐던 한(恨)을 찾기 위해 아내와 10개월 된 딸을 데리고 전라남도 해남과 진도 여귀산 기슭 탑리에서 생활하며 작업을 했다.

"진도는 바다와 산, 하늘과 바람, 별이 같이 있어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곳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가장 어린 곳입니다. 이곳에서 예술을 통한 동서양의 만남을 시도하며 초인 시리즈, 진도의 장례식 풍경, 우리나라의 억압적인 정치, 사회 모순에 대한 상징성 있는 작품들을 완성했어요."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과 워싱턴주 올림픽반도를 오가며 작업하던 중 미국 서북부에 있는 염소 농장에 정착해 연어 낚시, 등산, 정원 가꾸기 등을 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1992년에는 두 달 동안 우루무치, 둔황, 나주, 시안, 티베트, 네팔, 인도의 시킴 라다크 등 주요 지역을 답사하며 동서양 예술의 융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2011년 히말라야로 들어갔다.

"지난 20년간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히말라야에 오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턴 아예 히말라야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고산지대인 만큼 작업이 쉽지 않다. 추운 날씨와 거센 바람이 그의 작품을 방해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고산지대는 산소가 부족해 애써 그린 작품들의 물감이 잘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히말라야의 숨겨진 얼굴을 그리고 싶어 한다. 해가 떠오르기 전 설원 너머로 빛이 퍼지는 순간, 자연의 위대함과 편안함을 느낀다고.

"히말라야는 우리 마음의 근원, 혹은 원형이 아닌가 싶어요. 그 속에 있으면 삶 그 자체를 만나는 것 같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방인의 눈으로 히말라야를 보지만 나는 (우리 민족과 뿌리가 같은) 히말라야를 우리의 삶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그림, 나의 예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단순한 형태·강렬한 컬러 실험정신 돋보여

한국적 정서 표현 '안과 밖 시리즈'도 눈길

11일까지 '타임라인'전


'보헤미안' 화가 최동열 화백이 오는 11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타임라인(Time line)'전을 갖는다. 작가가 미술을 시작한 1977년부터 최근작까지 50여점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1층과 2층에 걸쳐 시기별로 나눠 전시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보헤미안'이라는 타이틀로 구성된 작품들은 작가의 초창기 작품을 비롯해 멕시코 유카탄 코바 마을에서 원주민을 만나 그린 작품 등 다양하다.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컬러감이 돋보이는 이 시기에는 작가로서의 다양한 시도와 실험 정신이 엿보인다. 화백의 첫 유화 작품인 '뉴올리언스의 재즈 뮤지션'은 1977년 뉴올리언스 프렌치쿼터공원의 벤치에서 공연하고 있는 두 명의 흑인 뮤지션을 단순한 필치로 표현한 수작이다. 1981년작 '학살'은 베트남전 참전 경험이 녹아 있는 듯 전쟁의 참혹함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부서진 인형 조각과 인체를 절단해 처참한 분위기를 희화시키면서 전쟁에 의해 파괴당한 인간의 실존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유카탄(1984년작)'은 멕시코 유카탄 코바 마을에서 한 여인이 출산을 하다가 아이가 주검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극한의 상황에 놓인 인간의 절규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최 화백을 '신표현주의 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요 작품 중 하나다.

1984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지는 '안과 밖 시리즈'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다니며 길에서 훔쳐 보던 실내를 작품으로 옮겨 놓았다. 1984년 유카탄에서 시작된 '한국 산수가 보이는 한국 침실' 시리즈는 뉴욕 생활 중 정지됐다가 1996년 올림픽 반도 작업실에서 다시 부활한다. 한국에서의 삶을 회상하며 그린 한국의 방은 이불·요·베개·요강·장·화장대 등 한국의 실내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조화롭게 배치해 한국적 정서를 잘 표현했다는 평이다. 이후 뉴욕에서 생활한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배경을 뉴욕 야경으로 대치하고 2001년부터는 동양화로 처리된 산수와 올림픽 반도 작업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수를 실내의 정물과 대치한다.

이후 거처를 옮길 때마다 그곳의 정서를 바탕으로 도시와 정물·누드를 적절히 배치해 안과 밖 시리즈를 연작한다.

최근에는 신들이 거주하는 성스러운 산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히말라야를 직접 다녀와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02) 734-0458

He is…

△1951년 부산

△1963년 경기중학 입학

△1967년 검정고시 거쳐 한국외대 베트남어과

최연소 입학

△1968년 대학 중퇴 후 해병대 입대

△1969~70년 베트남전 참전

△1971년 미국 유학

△1972~77년 플로리다·뉴올리언스 등 체류

△1978년 미술 입문

△1985년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첫 개인전

△1987년 한국 초대전

△2011년 히말라야에서 작업 시작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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