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부분 각자 나름대로의 이중잣대를 갖고 살고 있다.
자기합리화나 자기위안을 위한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이중잣대를 알게 모르게 쓴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하지 않던가. 남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터무니없이 관대한 잣대를 쓴다.
이중잣대의 형태 중 하나가 자기입장을 내세우려고 남을 억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국민의 뜻’이란 말이 가장 대표적이다. 정치인 본인의 의도와 욕심을 말하면서 겉으로는 ‘국민의 뜻’이라고 포장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뜻이라지만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는 국민에게 물어봤나 의문이다.
아마도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남이 믿어주거나 지지해주기를 바라며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잇달아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국민들을 헷갈리게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정치권에서 하도 국민을 내세우니 우의(牛意)ㆍ마의(馬意)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이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고도 했으니 여론조작이나 과장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모양이다.
이중잣대의 또 다른 문제는 습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해석을 하다가 차차 최면에 빠진 것처럼 자기합리화나 자기미화의 흐름으로 빠져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면서 변신로봇 같은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것보다는 차라리 중간절충주의를 당당하게 내세우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중간절충이나 중도통합을 쉽게 수용하는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른쪽이나 왼쪽,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입장과 색깔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칫 ‘회색주의자’로 매도되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중간절충주의자의 입지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타협을 통한 절충보다는 극단적인 대립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대화와 절충으로 양보와 합의를 도출해내는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하게 발전시키고 사회 각계각층에 이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신축성 있고 유연한 중간절충주의를 더욱 고취하고 권장해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