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브라질 월드컵-러시아전 1대1 무승부] 거리서… 지하철서… "다시 일어서리라" 하나된 붉은 함성

■ 응원전 이모저모
넥타이부대 ·학생 등 동참… 골 터질때마다 환호·탄식
지하철서 경기 보던 시민들 모르는 사람과 즉석응원전
전후반 휴식시간 이용해 기말고사 공부하는 학생도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러시아와 예선전을 치르고 있는 태극전사들을 응원하고 있다. /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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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러시아 간 월드컵 H조 1차전 후반전이 열린 18일 오전8시26분께. 대형전광판에 이근호 선수가 그토록 고대하던 첫 골을 넣는 장면이 보이자 서울 광화문광장에 빼곡히 모인 수만의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자축했다. 곧이어 약속이라도 한 듯 2002 한일 월드컵 때 전국에 울려 퍼진 응원가인 "오~ 필승 코리아!"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선취골 후 6분 만에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아~"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이날 경기 90분 내내 응원 열기만큼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날 광화문광장과 삼성동 영동대로에 모인 시민들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0만 응원 인파에는 못 미치는 4만여명이지만 출근을 한두 시간 앞당겨 응원을 온 넥타이 부대와 기말고사 기간의 학생들이 다수 참가해 응원 열기가 예년 못지않았다. 일상의 활력, 국위 선양 기회 등 각자의 참가 이유는 다양했지만 이날 붉은 악마가 공개한 '다시 일어서리라 자랑스런 대한민국이여'라는 슬로건 아래 세월호 참사로 상처 입은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자는 마음은 같았다. 응원에 참가한 김태흥(39)씨는 "응원 인파가 줄어든 걸 보니 아무래도 세월호 여파가 있었던 것 같다"며 "그래도 이번 월드컵 경기 잘 이겨서 다시 한번 대한민국이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바쁜 업무로 사내 메신저로만 이야기를 주고받던 직장 동료들도 이날만큼은 오프라인에서 함께했다. 직장인 김태영(32)씨는 "입사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일터로 생각한 광화문에서 직장 일이 아닌 이유로 동료들과 만난 게 처음"이라고 흥겨웠던 소감을 전했다. 일부 회사에서는 경기 일정을 배려해 출근 시간을 한 시간씩 늦춰주기도 했다. 붉은악마로 활동한 지 16년차인 직장인 노시온(31)씨는 "회사에서 출근을 열시까지로 늦춰줘 붉은 악마 일정에 참가할 수 있었다"며 "경기가 아침시간이라 걱정했는데 예전처럼 제대로 즐길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막간을 이용해 틈틈이 이날 예정된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하는 대학생도 눈에 띄었다. 대학생 김모(26)씨는 "마케팅 원론 시험이 10시에 있지만 응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며 "아직 못 본 부분이 좀 있지만 경기가 잘되면 시험도 잘 풀릴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후반에 이근호 선수가 선제골을 넣자 한참을 동행한 친구들과 얼싸안으며 응원을 하다 시험시간이 닥치자 주위 사람들에게 "끝까지 함께 못해 미안하다"며 급히 자리를 뜨기도 했다.

이날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서로 모르는 승객들끼리 즉석 응원전이 벌어지는 진풍경도 있었다. 출근 시간과 경기 시간이 겹쳐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DMB 등으로 경기를 조용히 지켜보던 시민들이 골이 터지자 참지 못하고 "와 ~골이다"를 외치자 객차 안 이곳저곳에서 숨죽이고 경기를 지켜보던 승객들이 참았던 함성을 연달아 내지르기도 했다. 3호선을 타고 출근하던 박모(25)씨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민망했는데 다들 각자 핸드폰으로 경기를 보다 눈이 마주쳐 웃고 말았다"고 했다.

러시아전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23일 2차 알제리, 27일 3차 벨기에전에 대한 기대감은 더 커지고 있다. 일부 해외 언론이 대한민국의 3패 가능성을 예측한 터라 무승부에도 시민들의 표정은 밝았다. 붉은악마 16년차로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희끗희끗 흰머리로 응원하던 황정진(57)씨는 "장하다. 정말 잘했다"며 "내심 응원 오면서도 회의적이었는데 16강 가능성을 이번 경기에서 보여준 것 같다"고 흡족한 마음을 드러냈다.

각자 일터·학교 등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 십여개의 붉은 악마 소모임은 짧은 해단식으로 다음 경기를 기약하며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졌다.

시민들도 서둘러 자리를 뜨는 와중에도 밤새 먹은 야식과 음료수·돗자리 등 짐을 다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처음 활동을 시작한 대학생 'CU 클린 봉사단' 김원정(25)씨는 "경기 끝난 지 십분 될까말까 한 시간에 각자 쓰레기를 스스로 치우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거리응원이 발전하면서 시민의식도 함께 발전하는 것 같아 자랑스럽다"고 했다. 응원을 마친 시민들은 응원 주최 측 공지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질서를 지켜 각자의 일터와 학교로 향했다. 이날 경찰 측 추산에 따르면 서울 광화문광장(1만8,000여명), 삼성동 영동대로(2만4,000여명)를 비롯해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등 전국 20여곳에 거리 응원 인파가 몰려 뜨거운 월드컵 열기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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