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칼럼/9월 27일] '공정사회' 담론과 노사정 담합

'공정사회'가 한국사회 담론의 지배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만큼 '공정'에 대한 국민의 갈망이 오랜 기간 높았기 때문이다. 최근 마이클 샌달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폭발적인 판매액을 기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정이란 정의와 상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샌달보다 이전에 한국 독자에게 잘 알려진 존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 명제에서 보듯이 정의는 공정으로 대변된다고도 할 수 있다. 롤스의 '공정'은 다분히 분배적 정의를 함축하고 있는데 필자가 아는 한 공정의 법제는 19세기 말 영국의 '공정임금(fair wage)'에서 출발한다. '공정거래(fair trade)'는 이보다 훨씬 뒤이며 '차이의 원리(principle of difference)'에 입각한 분배적 정의는 비교적 최근에 미국의 방송관계법에서 명시화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배적 의미나 거래적 의미를 넘어 공정은 자율과 사회적 동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자율침해와 담합은 공정사회의 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노사관계 선진화 법제의 일환으로 노조 전임자의 임금을 노조가 자체적으로 부담하는 데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로서의 타임오프제는 그런대로 공정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 특정 노총 종사자의 임금을 산하 조합원이 아닌 외부 경제단체가 부담하기로 한 것은 공정임금과 관계없는 자율침해요, 노사정 과두체제의 담합이기 때문에 명백히 공정의 원리에 위배된다. 타임오프제의 실시로 임금을 못 받았다고 보도된 한국노총 종사자들의 임금은 지급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것도 경제단체가 모금하여 해결해 주었다고 하니 동정에 앞서 탄식 소리가 들려온다. 이미 타임오프제 협상과정에서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을 노사정이 '합의'했다고 하니 스스로 타임오프제의 기반을 허무는 담합부터 한 셈이라는 것이다. 한국노총의 타임오프제에 대한 저항이 미약했던 이유는 명분이 약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임금은 그런 식으로 확보해 두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는 대목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회사로부터 임금 받으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데모나 하는 노조전임자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했던 경제단체가 이제 한국노총에 '공익사업'을 발주하고, 한국노총은 그 재원을 가지고 120여 명의 임금을 해결하고, 타임오프제의 관철을 강조했던 정부가 이를 돕기 위해 면세 혜택을 제도화했다고 한다. 자율을 내팽개치고 사회적 동의 없이 '그들만의' 손발을 맞춘 담합 앞에 국민들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게다가 이 담합의 한 장본인이 '공정사회' 담론의 제시자로 보도되자 "세상에 믿을 놈 없다더니…"라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다. 심지어는 정책당국자가 "한국노총 전임자가 관련사업에서 자기역할을 해 돈을 받는 것이니 임금지원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수단으로 목적을 정당화시키는 궤변마저 늘어놓고 있으니 필자로서도 어처구니가 없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자체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무리한 담합의 바탕에는 '노동계 편가르기'의 속물 정치적 발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담합의 당사자들은 애써 부인하려 들겠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한국노총을 키우고 상대적으로 강성인 민주노총을 견제하겠다는 정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는 공정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공정사회'의 깃발 아래서 우리사회 힘 있는 자들의 불공정 담합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노사정 과두체제의 임시방편적 발상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공정사회를 역주행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듯한 안이한 발상이 문제인 것이다. 누가 이 역주행을 막을 것인가? 담합의 당사자들을 밀쳐두고 조합원과 기업가들 그리고 국민이 나서야 한다. 한국노총은 노동운동을 포기하지 말라고, 경제단체는 경제나 살리라고, 그리고 정부는 공정하라고 다그쳐야 한다. 그래도 '공정사회'를 배반하면서 염치없는 담합을 밀고 나간다면. 참으로 암담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공정사회'의 깃발을 우리 스스로 내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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