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재상에 오른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는 한때 부친의 가업을 이어 농부를 꿈꿨다. 그런 그가 '의리'와 '성실성'을 바탕으로 도의원ㆍ군수ㆍ도백을 거쳐 이명박 정부 3기 국무총리에 올라 대권까지 바라볼 수 있는 중앙정치의 거물로 거듭났다.
김 후보자는 지난 1962년(실제 1961년생) 경남 거창에서 소를 키우던 농군의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무척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머리에 이고 가던 물동이에 소똥을 몰래 집어넣었다가 혼나기도 하는 등 "말썽거리만 생기면 동네사람들이 우리집으로 몰려와 '태호 어디 있느냐'고 했다"고 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버지가 "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고 했을까.
부산 동아대를 중퇴하고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짓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김 후보자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 실제 김 후보자 손 곳곳에서 쇠꼴을 베다 난 상처가 남아 있다. 하지만 "농사를 짓더라도 농약병에 적힌 영어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부친의 말에 자극을 받아 장학생으로 거창농고에 입학했다.
서울대 농업교육과 재학시절에는 아버지의 친구로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고(故) 김동영 전 의원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면서 정치권과 연을 맺었다. 그는 암에 걸려서도 YS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던 김 전 의원에게 정치인의 '의리'를 배웠고 상도동계 정치인들의 심부름도 하고 산도 같이 오르면서 끈끈한 정을 쌓았다.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대학강사를 할 때만 해도 대학교수를 꿈꿨던 김 후보자는 1992년 총선에서 이강두 전 의원 선거 캠프에 합류하면서 정치에 입문한 뒤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에서 사회정책실장을 맡았다.
1998년 36세에 거창에서 도의원으로 당선된 데 이어 40세인 2002년 지방선거에서 전국 최연소 민선 군수를 지내 정치권을 깜짝 놀라게 했다. 42세인 2004년 김혁규 전 지사의 사퇴로 공석이 된 경남지사 보궐선거에 당선된 데 이어 2006년 선거에서도 연임해 지난 6월까지 도백을 맡았다. 지사 시절 상징적 정책으로 '남해안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도정에 혁신의 바람을 불러넣었다는 평이다.
밑바닥부터 만만치 않은 정치력을 갖고 있는데다 혁신적 사고와 젊은 이미지, 추진력을 인정받으며 잠룡군에 꾸준히 거론돼왔다. 홍상표 청와대 홍보수석은 "지사 재임기간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각종 현안들을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해결했고 따뜻하고 진솔한 리더십을 갖고 있다"며 발탁배경을 설명했다.
김 내정자는 6ㆍ2지방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행정안전부 장관설이 돌았고 이어 당 대표 출마설, 청와대 비서실장설, 국무총리설이 나왔다가 결국 이달 초부터 총리 발탁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근 홍준표 최고위원이 "박연차 사건과 관련(무혐의로 판정)돼 총리로서 부적격"이라는 비판을 한 것처럼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혹독한 시험대를 거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내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과 지방인사가 중앙무대에 안착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김 후보자의 등장은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자,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함께 중도실용주의, 친서민 국정기조 실현에 앞장서며 정치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근혜 전 한나라당대표가 독주하고 있는 여권 내 대권구도에 상당한 파장을 낳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가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경우 1971년 6월 김종필 총리(당시 45세) 이후 약 39년 만의 40대 총리라는 기록을 갖게 된다. YS계로 박근혜 전 대표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김 후보자의 등장으로 친이계는 권력기반을 넓히면서 박 전 대표에 대해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임 실장 등과 함께 대항마군을 넓히는 효과를 갖게 됐다. 또한 한나라당의 아킬레스건인 젊은 층은 물론 최근 마찰음이 잇따르고 있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소통 확대에도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부인 신옥임(46)씨와 1남1녀. 특기는 태권도, 취미는 바둑이고 존경하는 인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