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유외환 글로벌 1위에 국내 상장 채권액도 2위
은행 등 1금융권까지 눈독… 본격 진출 대비 진지 구축
"먹튀 우려" 불신·경계 속 "지나친 반감 안돼" 지적도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인이 중국인 발 마사지 해줘야 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넘겼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럴 수도 있겠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만큼 중국의 성장세가 무섭다는 거죠. 실제 중국 관광객인 '유커'들에게 발 마사지를 해주는 한국 사람의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최근 중국 상하이에서 만난 한국계 은행 현지 법인 관계자는 중국 경제의 무서운 성장세로 한국인들이 중국인 밑에서 일해야 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경고를 중국에 너무 오래 머문 현지 주재원의 지나친 '호들갑'으로 치부하기 힘든 상황이다. 최근 국내 금융시장을 조금씩 장악해가고 있는 중국 자본의 움직임을 보면 되레 멀지 않은 현실에 가까운 모습이다. 실제 한국의 굵직굵직한 금융사가 자본시장에 매물로 나올 경우 중국 자본은 주요 인수 후보자 중 하나로 종종 손꼽힌다. 보험사나 증권사뿐 아니라 은행과 같은 1금융권까지 인수 타깃도 다양하다. 최근에는 국내 최대 증권사인 KDB대우증권 인수전에 중국 자본이 뛰어들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반면 한중수교 이후 중국의 문을 두드려온 국내 금융사는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자본력의 차이가 워낙 크기도 하지만 중국 당국이 설정해놓은 각종 규제의 벽이 두텁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이들 중국 자본은 금융사의 전통적인 해외진출 방식인 사무소→지점→법인 형태가 아닌 인수합병 전략을 통해 단번에 법인 형태로 진출해 빠르게 시장에 안착하고 있다. '차이나머니'의 공습이 차츰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넘쳐나는 중국 자금=이렇듯 먹성 좋은 중국 자본의 힘은 어디서부터 나올까. 전문가들은 중국의 넘쳐나는 자금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중국은 지난 3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이 3조7,300억달러로 세계 1위다. 외환보유액 세계 2위인 일본(1조2,458억달러)의 3배가량 되며 외환보유액 6위인 한국(3,715억달러)의 10배 이상 되는 수치다. 계속되는 무역수지 흑자로 달러가 쌓인 탓이다. 이는 그나마 지난해 3월의 외환보유액 3조9,500억달러와 비교하면 2,200억달러가 감소한 것이다.
외국인투자가의 국내 상장 채권 보유액 규모에서도 조만간 중국이 1위 자리를 차지할 기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국내 상장 채권은 미국이 18조8,350억원을 보유해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16조9,650억원을 보유한 중국이 간발의 차로 뒤쫓고 있다. 중국의 국내 상장 채권 보유액은 2013년 12조5,090억원에서 지난해 14조7,090억원까지 크게 늘었으며, 올 들어 성장세도 15.3%에 달한다. 반면 미국은 2013년 20조580억원에서 지난해 18조6,540억원으로 줄었으며 올해도 1% 정도 느는 데 그쳤다. 중국 본국의 증시 폭락으로 이 같은 상승세가 주춤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지만 중국이 지난해 10월 1억달러 이상을 해외자산에 투자할 경우 당국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한 규제를 없애는 등 해외투자를 장려하는 상황이라 기세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국영은행들은 이같이 넘치는 자금을 바탕으로 세계 은행 순위에서 상위권을 독차지하고 있다. '더뱅커'가 올해 공개한 순위에서는 중국공상은행(ICBC)이 3년째 1위에 자리를 지켰으며 2위는 중국건설은행, 4위는 중국은행(BoC), 9위는 중국농업은행이 각각 차지했다. 실적 면에서도 더뱅커가 선정한 1,000대 은행에 든 중국 은행들의 순이익은 미국 은행의 2배, 영국 은행의 10배에 달한다. 시중은행 중국법인 고위 관계자는 "중국이 비교적 선진 금융기술을 보유한 한국에 투자하는 것은 향후 본격적인 진출에 대비한 하나의 진지를 구축한다는 측면에서 크게 나쁠 것이 없다"며 "무엇보다 중국 자본이 2008년 금융위기 때 유럽시장에서 꽤 손실을 봤던 것을 감안하면 자산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한국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고도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중국 자금에 대한 불신은 여전=중국 자본의 이 같은 물량공세에 대해 국내 금융사들은 다소 경계하는 모습이다. 국내 시장에 뛰어든 중국 자본에 대한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데다 제2의 론스타 같은 '먹튀' 자본으로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말 우리은행 매각이 무산된 후 국내 금융권 관계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비입찰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안방보험과 교보생명이 인수전에 뛰어들 것으로 예측됐으나 교보생명이 막판에 발을 빼 매각 자체가 무산됐다. 당시 안방보험과 교보생명이 맞붙었다면 자금력 우세를 앞세운 안방보험이 우리은행의 최대 주주에 올라설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국내 주요 대기업과 거래가 많은 우리은행을 중국 자본에 넘길 경우 기업의 자금상황 악화는 물론 국내 기업의 각종 정보 등이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매각 무산을 반기는 분위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당시 금융위원회가 유효경쟁이 성립할 수 없게 교보생명의 입찰참여를 막았다는 뒷얘기까지 나왔다.
안방보험이 6월 동양생명 지분 63% 인수를 금융위원회로부터 최종 승인 받았을 때도 중국 자본에 너무 쉽게 시장을 내주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국내 생명 보험사는 중국 생보사 지분의 50%를 초과해 인수하는 것이 금지돼 있어 상호주의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안방보험은 다음달께 중국 금융당국의 승인이 떨어지면 국내 생명보험 시장에서 본격적인 영업에 나서게 된다. 이외에도 2010년 광주은행 인수전에 뛰어든 중국 공상은행과 LIG손해보험 인수전에 참여했던 중국 최대 민영 투자자본인 푸싱그룹에 대한 업계의 시각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단, 이 같은 중국 자본의 국내 금융시장 침투에 대해 지나친 거부감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 미국이나 일본·유럽계 자본 등이 국내 은행이나 보험·저축은행 등에 대거 진출한 상황에서 중국 자본에 대해서만 지나친 경계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신성환 한국금융연구원장은 "국제화라는 관점으로 보면 돈이 어디서 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러한 돈들이 제대로 투자돼 제대로 굴러가는지 여부를 봐야 한다"며 "특히 금융기관은 공공적 성격도 있고 파산할 경우 문제가 커지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중국 자본의 국내 유입 현상을 봐야지 중국 자본이 국내에 투자해 이익을 중국 본국으로 송금한다는 식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