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71> 도망가자, 보이지 않는 곳으로 中

미지의 세계로 나가길 원하는 어린아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는 스스로 위험한 줄 압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생존할 수 있는 선상에서 모르는 어떤 곳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조금 더 먼 지점에 발을 담가 보곤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집니다. 우린 도망가고 싶은 사람들이니까요. /사진출처=morguefile.com

전편에서도 이야기했듯 사람은 차이에서 재미를 느낍니다. 그리고 차이가 점점 좁아져 동질감으로 접어들게 되면 실망하거나 싫증을 느낍니다. 그래서 또 다른 차이를 찾아서 이동하게 됩니다. 들뢰즈는 계속해서 도망가려고 하는 인간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봤습니다. 일본 철학자 중 한 사람이 이런 현상을 재밌게 표현했습니다. ‘탈주하는 본능’이라는 겁니다. 아사다 아키라(淺田彰)라는 일본의 철학자는 이 개념을 갖고 ‘도주론’(逃走論)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자기의 일상에서 도피하고 싶어 합니다. 판에 박은 그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죠. 똑같게 되기를 강요하는 삶은 권태롭고 단조롭습니다. 때때로 숨 막히기까지 합니다. 산업 사회는 항상 사람에게 평범하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시민’이라는 말이 그를 대변합니다.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하루 24시간을 잘게 쪼개어서 정해진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살아가게끔 강요한 것이죠.

솔직히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힘든 일입니다. 요즘 같이 복잡한 시대에는 세상이 평온한 삶을 살게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걱정은 더 많아집니다. 평범한 일상을 방해하는 변수들이 정말 많아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항상심’(恒常心)을 유지하면서 늘 같은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하라구요? 누군가는 도덕 책에 나오는 좋은 말이라고 느끼겠지만 누군가는 폭력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일탈을 합니다. 들뢰즈는 이 일탈이 정신분열증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모습들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그 순간, 당신은 전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곳으로 도망가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의미를 공유하고, 때로는 사랑을 하기도 합니다.

‘랜덤채팅’이라는 서비스는 그런 골격을 갖고 태어난 소통 플랫폼입니다.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위치 기반 정보로 추적해서 말을 걸고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입니다. 때때로 마음이 통한 젊은이들은 이 채팅을 통해 직접 만나기도 합니다. 노출 수위가 심한 사진, 특히 몸매나 얼굴의 특정 각도가 강조된 사진을 프로필로 올려놓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얼마나 연봉을 받는지가 중요한 평가의 척도이지만 ’랜덤채팅‘의 세상 속에서는 많은 이성과 교감할 수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전 같으면 ’풍기문란‘에 속하고도 남을법한 일인데 요즘은 막지 않습니다. 그걸 굳이 규제하려는 생각 자체가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들뢰즈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이방인을 만나는 플랫폼은 현대 사회의 분열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모바일 기기를 통해 자기가 탐색할 수 있는 네트워크 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생각지도 못했던 ’끝‘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죠.

예전에는 검증되지 않은 인연의 경우 본인의 경계 안에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일일이 물어보곤 했죠. 그가 어떤 지역, 고교 출신인지. 대학교에서 누구와 주로 소통했는지, 주류 사회와의 인연은 어떠한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대상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정주‘(定住) 방식으로 그 사람을 파악합니다. 경영학자들은 이러한 배경이 ‘정보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문제에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은 모를 때, 상대방이 나보다 어떤 부분은 더 많이 알 때, 거짓말을 하더라도 속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정보의 왜곡이 일어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당장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막으려면, 그를 알 법한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런데 끊임없이 미지의 누군가 또는 미지의 영역을 찾아 도망하려는 게 일종의 본능이라면,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가능한 지금 세상에 ‘제대로 알아가기’가 큰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붙들어 놔도 언젠가는 도망가기를 원할테니까요.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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