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정부마저… 이민 장벽 높이는 유럽

높은 실업률·복지재정 부족 등 경제난 책임 이민자에 돌려
英·獨·스위스·벨기에 이어 佛도 반이민규제 카드 꺼내


유럽 각국이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막기 위한 장벽을 앞다퉈 높이고 있다. 최근 중도우파인 영국 정부가 유럽연합(EU) 출신 이민자에 대한 규제를 도입하기로 한 데 이어 좌파인 프랑스 사회당 정권도 규제 대열에 동참한다. 고실업과 복지재정 부족 등 경제난의 화살을 이민자들에게 돌리는 극우정당이 보수층을 사로잡으며 기승을 부리자 유럽 각국 정부가 지지기반을 되찾기 위해 이민의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한 것이다.

2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등 외신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는 테러 방지를 이유로 EU 국가 출신 외국인들의 입국을 막을 수 있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법안은 EU 출신자라도 공공질서와 안보에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위협이 될 경우 가족을 포함해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상 같은 내용인 테러방지법과 이민법 등 두 개의 법안이 프랑스 의회에 제출된 상태로 테러방지법은 이미 지난주 상원을 통과했다. 베르나르 카즈뇌브 프랑스 내무장관은 "테러 전력이 있는 외국인들의 프랑스 유입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입법취지를 설명했다.

다만 이 법은 정부의 취지와 달리 동유럽 등 가난한 EU 국가로부터의 이민자 유입을 억제하기 도구로 악용 소지가 커 사실상 이민규제법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세르주 슬라마 파리 낭트대 법학과 교수는 "안보 위협이라는 정의가 매우 광범위해 사실상 누구나 입국이 거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정부도 EU 출신 이민자 유입을 강력히 규제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앞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EU 이민자에게 지급했던 실업육아 수당을 축소하고 일자리비자 발급을 거부당한 이민자들에게는 학생비자 발급도 금지하는 등의 이민자 규제정책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스위스도 지난 2월 EU 시민권자의 취업자 수를 제한하는 이민제한법을 통과시켰으며 독일 또한 실업 이민자들의 거주기간을 제한하는 등 규제의 고삐를 조일 계획이다. 실직한 이민자들이 독일에 거주할 수 있는 기간을 6개월로 줄이고 복지지원 부정수령이 발각됐을 경우 재입국을 일정 기간 금지한다는 것이다.

벨기에는 지난해 2,700명의 실직 이민자들에게 불합리한 재정부담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출국요구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이같이 유럽 국가들이 이민자 유입을 막기 위한 장벽을 높이는 것은 경제난으로 악화된 민심이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는 극우정당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극우정당들은 "동유럽 등 가난한 이웃국가에서 넘어오는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복지재정을 축낸다"며 보수층은 물론 고실업과 재정난에 지친 민심을 파고들어 세력을 불리고 있다. 좌파정부인 프랑스 사회당 정권도 실업률 고공행진으로 여론이 크게 악화하자 결국 반이민규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올해부터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출신에게 EU 노동시장이 전면 개방된 점도 유럽 선진국 내 반이민 정서를 자극하는 데 한몫을 했다. 프랑스 파리의 이민자지원 시민단체 대표인 클라우디아 샤를은 "정부의 반이민규제 법안이 동유럽에서 넘어오는 집시들을 겨냥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인력이동을 제한하는 반이민 정책은 EU 내에서도 논란이 크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거주자 이동의 자유는 EU 조약의 핵심"이라며 "영국의 이민규제 법안은 현행 EU 조약상 불법"이라고 강력히 규탄했다. 영국 야당인 노동당도 이민규제가 노동시장 회복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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