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엔高저지 태세속 트리셰 "强달러 중요" 졸릭 "대안 필요"

달러화 위상 흔들… 통화패권 싸고 신경전 치열


최근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이 갈수록 흔들리고 있는 달러화와 관련해 주요국들이 각기 다른 셈법으로 외환시장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나서고 있다. 극단적인 엔고 현상이 이어지자 일본 정책당국은 이미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했고 유럽중앙은행(ECB)은 세계경제 회복을 위해 '강(强)달러'가 중요하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세계경제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달러화의 입지가 위축됨에 따라 향후 통화 패권의 향방을 둘러싸고 치열한 신경전과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면서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이전에 비해 크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29일 국제외환시장에서 단연 주목을 끈 것은 일본 엔화의 움직임이다. 전날 달러당 88엔 초반까지 밀렸던 엔ㆍ달러 환율은 이날 장중 90엔대까지 반등하는 등 롤러코스터를 탔다. 엔화가 춤을 춘 것은 후지이 히로히사(藤井裕久) 재무상이 향후에도 엔고 현상이 가파르게 진행될 경우 엔화 강세를 저지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 후지이 재무상은 "나는 엔화 강세를 용인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며 "(가파른 엔화 절상으로) 극단적 상황이 되면 (엔화 매도) 개입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재무상 취임(16일) 이후 직접적으로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엔화의 일방적 강세 분위기를 진정시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올 4월 달러당 100엔대였던 엔ㆍ달러 환율은 현재 달러당 89엔대로 11%나 절상됐다. 더욱이 민주당 정권이 엔화 강세를 용인해 내수를 부양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히면서 엔화 강세는 더욱 속도를 냈다. 이렇게 되자 엔고를 지지해온 일본 정부로서도 수출기업의 타격과 보유 중인 미 국채 가치의 하락 등으로 달러 가치 지지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지이 재무상의 입장 변화 조짐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엔고 지지 기조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하라다 유이치로 미즈호기업은행 외환딜러는 "후지이 재무상이 엔화 강세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는 정도의 강력한 변화가 없는 이상 엔화 강세 흐름은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히라노 에이지 도요타파이낸셜서비스 이사도 "재무상의 발언은 예상할 수 있었던 수준으로 외환당국의 기본 노선이 바뀌거나 한 것은 아니다"라며 "일본은 인구 고령화와 성장률 둔화 등 펀더멘털상의 약점이 노출돼 있어 엔화가 장기적으로 강세 통화가 되기에는 무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따라서 필요할 경우 외환시장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도 하락한 달러화 가치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28일(현지시간) 브뤼셀에서 ECB 위원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달러강세는 세계 경제 및 글로벌 외환시장의 안정을 위해 절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트리셰 총재의 이날 발언은 지난 2월 이후 달러화가 유로화 대비 15% 급락, 유로화 강세가 유럽의 경기회복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특히 이날 언급은 미국이 최근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를 통해 글로벌 불균형 이슈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등 달러 약세를 의도적으로 용인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 받았다. 트리셰 총재는 "ECB가 유동성을 회수하는 출구전략을 단행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밝혀 달러 강세가 유럽 경제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반면 같은 날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WB) 총재는 "이제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힘이 변화하고 있는 만큼 미국은 달러의 지위가 기축통화라고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트리셰 총재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을 한 셈이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 국제관계학원(SAIS) 강연에서 "글로벌 경제에서 다음 지각변동은 이머징 국가들이 큰 영향력을 얻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며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틀림없이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졸릭 총재의 발언을 두고 "중국과 러시아가 달러화를 대체할 기축통화가 필요하다는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며 "졸릭 총재는 미국이 인플레이션 없이 건전한 금융시스템을 만들면서 부채를 어떻게 낮추느냐가 달러의 운명을 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미국 국무차관을 지낸 졸릭 총재의 달러화 관련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라고 지적한다. 그의 달러화에 대한 부정적 전망은 미국 경제의 회복 시점에서 재정적자 관리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한편 각국 정부에 공조의 필요성을 촉구하려는 이중포석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