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부동산 투기열풍 때처럼 산업현장 종사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기업은 산업현장에서는 떠나는 인재들을 잡아둘 묘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근로자들은 시대조류에서 낙오할 것을 우려하며 일손을 놓고 전전긍긍하고 있다.정보화와 인터넷 열풍은 우리 경제의 미래를 밝히는 축복임에 분명하다.그러나 그 그늘에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상당 기간 우리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해야 할 제조업이 흔들리고 있다. 어느새 근로자들로부터는 물론 정부정책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비틀거리고 있는 산업현장을 가본다.
김영호(金泳鎬) 산업자원부 장관이 무역상사 최고경영자들과 첫 조찬간담회를 가진 지난28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전자상거래(E-COMMERCE)도 좋고 벤처(VENTURE)기업도 환영한다. 하지만 벤처 지상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현장에 가보라. 요즘 제조업 종사자들의 사기는 바닥이다. 당장 수출하지 못하면 미래조차 불투명한 게 한국이다. 벤처기업과 기존 제조업체에 대해 균형있는 정책과 시각이 요구된다.』
종합상사 최고경영자들은 이날 벤처열풍으로 소외되고 있는 제조업에 대한 우려와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제조업체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정재관(鄭在琯) 현대종합상사 사장은 『직원들이 도대체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며 『당장 제조업체에서는 노사문제 등 풀어야 할 현안이 쌓여있는데 정부와 국민들은 인터넷·벤처만 외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철(金在哲·동원산업 회장) 무역협회장은 『산업화에서는 뒤졌지만 정보통신에서 앞선다는 취지는 좋지만 현재 열풍이 기존 제조업 종사자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템포 조절론을 내놓았다.
이런 벤처열풍에 대해 경계령은 그동안 우리 경제 도약의 원동력이 돼온 근로의식과 기업의 조직문화가 한꺼번에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이다.
이단 비단 경영자들만의 걱정은 아니다. 『남아 있는 우리는 시대 조류에 낙오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직원들을 휩싸고 있는게 사실이다』(현대자동차 A과장). 『주변에서 유능하다고 평가받던 바로 옆자리의 동료가 인터넷사업을 하겠다고 다른 동료들까지 데리고 나갔다. 남아 있는 근로자들은 구닥다리 아니냐는 자기비하의 분위기가 팽배하다.』(한국타이어 B대리)
『진로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모이면 누가 주식투자로 몇천만원을 챙겼고 누구는 인터넷기업을 창업해 잘나가고 있다는 얘기뿐이다. 이삼백만원 월급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과거처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금호그룹 K과장)
D그룹에 근무하는 S대리는 『최근 상당수가 벤처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데 이어 창업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회사에서 마음이 떠난 동료나 선배들도 많다』고 이직 엑소더스 후유증을 설명했다.
산업현장의 고민은 유능한 인재의 이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를 나서는 학생들에게도 이제 제조업은 한물 간 직장이다. 서울대 곽수일(郭秀一) 교수는 『요즘 졸업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은 외국기업이나 펀드매니저·인터넷기업이고 제조업체 는 별로 관심이 없다』며 달라진 세태를 전한다.
제조업을 떠받치는 기능인력 기반도 급격히 줄고 있다. 공업고등학교는 90년 현재 104개에 불과하고 입학정원은 80년 7만명에서 6만4,000명으로 줄었다. 고교 전체에서 차지하는 공고입학정원비율은 94.4%에서 7.7%로 대폭 감소했다.고등학교 기술교육이 공동화된 셈이다.
기존 인력은 빠져나가고 산업을 뒷받침할 신규인력은 양성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수출을 못하면 당장 석유 한방울 사올 수 없는 것이 우리 경제의 현실이다. 나도성(羅道成)산업자원부무역정책 과장은 『올 수출목표 1,600억달러에서 벤처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신산업 열풍이 성공적으로 정착된 모델로 미국을 거론하지만 미국과 우리 경제는 근본부터 틀리다.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에는 풍부한 자원과 방대한 국내시장이 있지만 우리는 수출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며 최근 제조업 경시풍조와 제조업 종사자들의 사기저하를 우려하고 있다.
『우리 경제를 끌고 갈 미래산업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받치고 있는 제조업 종사자들이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기업인의 말 속에 한국 제조업의 고민이 담겨 있다.
정승량기자SCHU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