펩시ㆍ페덱스ㆍ이케아ㆍ도이체방크ㆍJP모건 등 글로벌 기업 340여곳이 룩셈부르크 조세당국과의 비밀거래로 수십억달러 규모의 세금을 회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위의 부자나라인 룩셈부르크는 조세회피로 성장했다는 오명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5일(현지시간) 룩셈부르크 조세당국과 회계컨설팅 업체 프라이스워터스하우스쿠퍼스(PwC)가 주고받은 2만8,000여쪽 분량의 내부 기밀문서를 분석한 결과 이같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ICIJ는 이들 기업이 모두 수천억달러에 이르는 수익을 룩셈부르크 현지법인으로 돌려놓는 수법 등으로 수십억달러의 세금을 탈루했다고 설명했다. 일부 기업들은 룩셈부르크에서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세율을 적용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조세회피 행태가 드러난 업체들은 제조업·금융업 등 다양했다. 미국 물류업체 페덱스의 경우 룩셈부르크에 자회사 2개를 설립한 후 멕시코ㆍ프랑스ㆍ브라질 등 해외법인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이전했다. 룩셈부르크 조세당국은 이 수익에 소득세율을 0.25%만 적용하기로 페덱스와 사전 합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명품 브랜드 코치도 홍콩 등 해외 매출액을 룩셈부르크에 세운 자회사로 이전했으며 2012년 룩셈부르크 현지법인은 3,670만유로의 수익을 거두고도 세금으로 25만유로만 냈다. 도이체방크ㆍP&Gㆍ버버리ㆍJP모건 등이 유사한 방식으로 조세를 회피했다고 ICIJ는 밝혔다. ICIJ는 "이들 현지법인은 최소한의 사업활동만 벌였으며 한 주소에 등록된 업체만도 1,600여곳"이라며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전했다. 스티븐 셰이 하버드법학대학원 교수는 이 같은 조세회피 행위에 대해 "룩셈부르크가 기업들에는 '마법의 낙원' 같다"고 주장했다.
ICIJ는 PwC가 이들 다국적기업에 자문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룩셈부르크 조세당국이 작성한 과세규정 문서가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총 548건에 달했다고 덧붙였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양측이 이처럼 자문을 주고받은 것이 룩셈부르크 법률상 합법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행동에 대해 리처드 폼프 코네티컷대 교수는 "과세계획을 정부에 제출해 미리 승인을 받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니콜라스 마켈 룩셈부르크 재무장관은 "룩셈부르크의 과세 시스템은 경쟁력이 있으며 비윤리적이거나 불공정한 점이 없다"고 해명하는 등 조세와 관련해 기업들과 어떤 밀약도 없었다고 밝혔다. AIG·펩시·도이체방크는 이 사안에 대해 논평을 거부했다.
인구 약 54만명인 EU의 강소국 룩셈부르크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1만2,473달러(2103년 기준)인 세계 1위 부국이다. 언론들은 이번 폭로로 룩셈부르크가 기업들의 조세회피를 도우며 이를 통해 성장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룩셈부르크는 과거 철광석으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뉴욕·런던 등과 함께 금융업 중심지로 통한다. ICIJ는 "룩셈부르크 경제는 조세회피 활동을 목적으로 고용된 법률가나 회계사, 금융업 종사자들로부터 이익을 얻어왔다"며 "PwC만 해도 지난해 룩셈부르크에서 2,300명을 고용했고 올해 600명을 추가로 뽑았다"고 지적했다.
EU가 지난달부터 아마존·피아트 등 주요 대기업들과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실시 중인 조세회피 관련 조사에 미칠 영향도 주목된다. 이와 별도로 장클로드 융커 차기 EU 집행위원장은 이번에 드러난 조세회피 행위가 룩셈부르크 총리 재임시절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부담이 불가피해졌다.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겠느냐는 의구심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