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장수기업 키우자] <4> 기업가정신이 가른 장수기업

중기 승계는 富가 아닌 책임의 대물림… 창업 DNA·열정·도전정신 이어가야
대학부터 리더십 강화 훈련 필요
가업 이어받을 마땅한 2세 없을 땐 獨처럼 신탁재단 활성 방안도 고려

지난 3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한국가업승계기업협의회 정기총회에서 2세 경영인들이 함께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제공=중소기업중앙회

# 전자제품 코팅 소재와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점유율 1위였던 SSCP는 창업주인 오주언 회장의 아들인 오정현 전 대표가 2002년 취임한 후 운명이 바뀌었다. 그는 지난 2012년 갑작스러운 상장폐지로 개미투자자 2,000명에게 총2,000억원 이상의 손해를 입혔다. 당시 연 매출 1,800억원 규모의 중견기업이던 SSCP는 12억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하고 최종 부도 처리됐다.

검찰은 지난달 오 전 대표에 대해 횡령ㆍ배임 혐의를 포착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그는 SSCP 법인자금 460여억원을 사실상 자본잠식 상태인 자신의 개인회사 STM코퍼레이션에 무담보로 대출해주는 등 수백억원을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 오 전 대표는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2007년부터 6년간 회사자금 830여억원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동신유압은 2011년 김병구 대표가 취임한 이후로 승승장구 중이다. 지난해에 30%의 매출 증가를 기록한데 이어 올해도 10% 이상 성장을 낙관하고 있다. 지난해는 근로자 능력개발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지역중소기업으로서는 드물게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부자가 동시에 상을 받았다. 창업주로부터 이어지던 인본존중의 철학 아래 노사가 하나가 돼 신상필벌에 입각한 조직혁신에 나선 결과다. 기술혁신은 사람에게 나오는 만큼 직원들이 일하고 싶은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게 이 회사의 경영철학이다. .

이 같은 상반된 사례는 가업을 이은 2세대 경영인의 기업가정신으로 회사의 명운이 갈린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전문기술을 바탕으로 도전적으로 창업한 1세대의 DNA에 2세대의 기업가정신이 더해졌을 때야 비로소 노하우와 핵심기술이 유지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명문 장수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2008년 자신의 뒤를 이을 최고경영자(CEO)를 공개모집 하기도 했던 37년 역사의 음향시스템 전문업체 가락전자 장병화 회장은 "중소기업의 승계는 부가 아닌 책임의 대물림"이라며 "자식이라도 부족하다면 절대 회사를 이끌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항아리 만드는 가업을 3대째 잇고 있는 황충길 전통예산옹기 대표도 "아버지의 열정과 운영방침을 이어받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아들이라고 해도 회사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2세대 기업인들이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한 성공사례는 속속 나타나고 있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으로 10년째 300억원대의 매출을 기록하던 쿠쿠전자를 5,000억원대 명품 밥솥 브랜드로 키운 구본학 대표, 석유난로 중심에서 종합생활가전업체로 도약한 유일한 파세코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김형석 신영에프엔씨 대표는 "회사에 대표로 부임하며 과거 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의 직장 경험과 아버지로부터 배운 기술력을 결합해 새로운 식품 관련 브랜드를 만들었다"며 "창업 때부터 소금 관련 OEM을 주로 하던 아버지가 반대도 했지만 끊임없이 설득한 끝에 결국 지난 5년간 250%가 넘는 매출성장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명품 장수기업이 많아지면 이는 곧 새로운 의미로 한국형 히든챔피언이 될 수 있다. 독일 히든챔피언 중 대다수는 가족경영을 바탕으로 수백 년에 걸쳐 이어져온 장수기업이다. 유상수 삼일회계법인 전무는 "설립자의 취지와 이념을 후속세대가 이어받으려는 노력이 아직 부족한 편"이라며 "해외와 같이 재단을 설립해 전통을 만들고 철학을 전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인 지원은 차치하고라도 후계자 양성, 글로벌화, 기술혁신 등에 있어 기업 스스로 강해지려는 노력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우선 대학 교육부터 관련 업무 경력, 내부 업무 수행까지 후계자의 체계적인 역량강화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대표를 맡은 뒤에는 전적으로 의사결정을 일임해야 책임있고 진취적인 경영활동이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남영호 가족기업경영연구소장(건국대 교수)은 "큰 회사에서 시스템을 배우는 사외교육 5년, 경력사원처럼 똑같은 절차를 밟고 들어와 다양한 부서를 경험하는 사내교육 5년, 본격적인 리더십 교육을 받는 5년 등 최소 15년 간의 기나긴 과정이 후계자 양성을 위해 필요하다"며 "20대 후반에는 기능전문가 기술, 30대에는 기업에 대한 전반관리, 40대 이후에는 리더십 교육 등 경력개발 타임 테이블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반드시 2세에게 물려준다는 생각도 바뀔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2세 중 가업을 이어받을 만한 인물이 없을 경우 다른 방식의 가업 승계도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심충진 건국대 교수는 "독일처럼 신탁재단이 활성화되면 창업주의 가업은 지속적으로 이어가면서 대규모 상속세 납부에 따른 회사 재무 리스크도 피하는 제3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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