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금융구조조정] 2.오만한 관료집단

제일은행 매각을 위해 뉴브리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던 지난해 연말. 정부는 모든 협상을 마무리한 듯 거창하게 홍보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협상시한을 정했다.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앞두고는 며칠 내에 협상이 타결될 듯 공언했다. 세계적 투자회사인 뉴브리지가 아마추어 협상가들의 어눌한 대응을 놓칠 리 없었다. 조급증 환자를 후릴 방법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흔들리는 금융 구조조정. 이는 정책당국자들의 아마추어식 협상자세와 「오만한」 태도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다. 환란 이후 정부는 금융 구조조정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왔다. 구조조정은 국가생존을 위한 대명제로 각인됐고 어느 누구도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이는 관료들에게 지나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경기가 호전국면으로 돌아선 올해 관료집단의 위기의식은 소멸돼갔다. 대신 「우리가 하면 무조건 된다」는 식의 안일한 의식이 지배했다. 대한생명 처리를 둘러싸고 최순영(崔淳永) 회장측과의 법정다툼 끝에 법원으로부터 「절차잘못」이라는 코미디에 가까운 판정을 받은 것은 관료들의 무사안일주의가 극에 달한 대표적 사례다. 위기의식의 퇴색은 제일·서울은행 매각과정에서 이미 나타났다. 정부는 금융기관 매각의 대외적 이유로 대외와의 약속 외자유치 선진 금융기법 전수 등 세가지를 들었다. 정부는 이를 불문율로 삼았다. 뉴브리지와 MOU를 체결하면서 이 목표들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됐다며 한껏 도취됐다. 그러나 상대를 너무 우습게 보았다. 은행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지못한 채 어설프게 세금을 투입하고 시한마저 설정, 갖가지 협상안을 들고 나온 뉴브리지에 끌려다녔다. 모건 스탠리라는 「협상의 귀재」를 대타(代打)로 동원했으면서도 뉴브리지의 잇단 요구에 당하기만 했다. 이러는 동안 HSBC와의 서울은행 매각협상은 한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 사라지고고 있었다. 매각이라는 「불변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금감위는 「속전속결」이라는 매각의 제1원칙을 잊었다. 「왜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지향점도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정기영(鄭琪榮) 삼성금융연구소장은 『무리하게 협상을 벌이느니 미리 방향을 바꿨어야 했다』며 『재무관료 출신인 금감위 당국자들이 너무 보수적으로 일했다』고 꼬집었다. 협상이 꼬일 때 냉철한 중간점검을 통해 두 은행 처리에 대한 그림을 다시 한번 그릴 여유가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대생 처리과정에서 LG그룹의 참여를 둘러싸고 정부가 갈팡질팡하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1차 입찰 때 LG의 참여를 사실상 유도했던 정부는 2차 때는 5대 재벌 문어발 확장을 이유로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3차 때는 「외국자본과 합작하고 지배적 경영권을 갖지 않는다」는 궁색한 조건을 붙여 참여허용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시장경제 원리를 철저히 무시한 독단의 연속이었다. 금융 구조조정이 한창인 가운데서도 관료들은 종래의 힘겨루기를 지속했다. 기업 구조조정과 끈이 닿아 있던 생보사 상장을 놓고 관계장관들끼리 「내가 옳다」는 식의 줄다리기를 벌인 모습 또한 코미디다. 문제는 앞으로다. 구조조정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들을 현 시점에서 문책할 수는 없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일단은 맡기고 책임추궁은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관료집단의 문제를 짚으면서도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김영기기자YGKIM@SED.CO.KR 한상복기자SBHAN@HK.CO.KR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