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에 짓눌린 행정의 한계

"절차와 내용이 상충될 때 어느 것이 우선돼야 합니까. 아니 절차가 내용을 훼손해서야 되겠습니까" 8일 중앙청사에서 취재중인 기자에게 다짜고짜로 S모 국장이 던진 질의ㆍ답변이다. 그를 흥분 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전말은 이렇다. 정부 각 부처에서 제출된 시행령 이상의 법령은 규제개혁위원회ㆍ법제처ㆍ차관회의ㆍ국무회의 등 절차 라인을 거치게끔 돼 있다. 규개위는 규제사항에 대해 법적으로 최종 심의하고, 법제처는 규개위 통과 안이 법 체계상 수정을 필요로 하는 지를 검토하는 한편 차관회의에 안건을 상정할 권한을 갖고 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절차상 하자가 없다. 문제는 '차관회의부터 사실상 합의된 안건만을 올려야 한다'는 암묵적인 업무상 관례에서 연유한다. 이런 절차상 '누수'를 간파한 일부 공무원들은 규개위 심사 때 수정돼 의결된 안이 법제처에서 제동이 걸리면 어김없이 규개위에 재심의를 요청한다. 이제 절차가 내용을 갉아먹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다. 법제처는 해당부처와 규개위 간에 다시 합의를 보라고 심의가 끝난 안건을 규개위로 되돌려 합의를 종용하고, 규개위는 "심의 때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냐"며 어이없어 한다. 결국 법령 시행일에 쫓기는 관련 부처가 규개위 의결안과 법제처의 합의 요구 사이에서 어설프게 타협, 안건의 내용이 왜곡돼 차관회의에 상정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차관회의 때 '윗분' 들의 편의를 봐 준답시고 합의된 안건만을 올리는 '아랫사람'들의 노력이 가상하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토론의 장이 항상 항상 '실무진의 마당'이어서는 안 된다. 차관회의ㆍ국무회의는 미합의 안건에 대한 실무진의 치열한 토론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처리할 안건이 너무 많다면 미합의 안건만 다루면 된다. 나머지 안건은 말 그대로 '결재 도장'만 찍으면 된다. 이상훈<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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