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해법 시계제로… 디폴트 우려 커진다

키프로스 의회 구제금융안 비준 거부
ECB 유동성 공급 끊어지면 금융거래 전면 중단 가능성
독 양보 등 강대국 지원 관건
키프로스ㆍ러 첫날 협상 결렬

키프로스 의회가 '예금자 부담'을 전제로 한 100억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안 비준을 거부함에 따라 키프로스 위기의 진화 여부가 '시계제로' 상태에 빠졌다.

키프로스가 구제금융 재협상을 도출해내지 못하거나 새로운 재원조달 방안을 찾지 못할 경우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해법의 열쇠를 쥔 독일ㆍ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시각차가 여전해 사태의 장기화가 예상된다.

19일(현지시간) 키프로스 의회는 임시회의를 열어 예금자 과세 방안이 담긴 구제금융안 비준을 거부했다. 키프로스 정부는 예금자들에게 6.75∼9.9%의 세금을 부과하는 구제금융안이 국민적 반발을 불러 일으키자 '2만달러 이하 무과세안'을 의회에 수정 제의했으나 단 한표의 찬성표도 얻지 못했다. 수백명의 시위대가 국회 앞으로 몰려나와 반정부시위에 나선 가운데 의회는 반대 36표, 기권 19표를 얻은 안건을 대통령에게 돌려보냈다.

집권당인 민주당의 에버로프 네오피토 원내대표는 "유럽연합(EU)의 기초를 흔드는 비도덕적인 결정이자 키프로스에 '경제적 자살'을 강요하는 행위"라며 "우리를 유로존 밖으로 내몰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국경일 연휴가 끝나는 목요일에도 은행 문을 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며 은행 금융거래의 전면적 중단이나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 가능성을 우려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키프로스 정부는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회의) 등과의 재협상을 통해 예금과세로 충당하려던 58억유로의 재원을 벌충할 새로운 방안을 찾을 방침이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타임스(FT)는 "키프로스의 신용등급이 CCC+로 낮아 정상적인 국채발행이 이뤄지기 힘들다"며 "결국 독일의 양보와 러시아의 지원 여부가 해법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의회 표결 직후 "키프로스 의회의 결정이 유감스럽다"며 "대중의 항의가 우리를 비이성적인 결정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라고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국제통화기금(IMF) 및 유럽위원회와 후속대책을 논의하고 있다"면서도 "ECB가 키프로스에 대한 유동성 공급을 중단한다면 은행들은 즉각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는 다소 퉁명스러운 반응을 내놓았다.

6월 만기 도래하는 15억달러의 채권을 갚지 못하는 디폴트 위기가 눈앞에 다가오면서 키프로스 정부도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디스 키프로스 대통령은 의회 부결 직후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전화로 SOS를 요청했고 미할리스 사르리스 키프로스 재무장관은 차관조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날 밤 러시아로 향했다. FT에 따르면 키프로스는 러시아로부터의 신규 차관 등을 추진하고 있으며 2011년 러시아에서 받은 25억유로 규모의 차관도 5년 상환 연장을 요청했다.

FT는 "'예금자 무과세'라는 원칙을 깬 조치에 포함된 독일의 속내는 키프로스 사태에 러시아도 책임을 분담하라는 뜻"이라며 "정부가 의회에 제안한 수정안 역시 주요 예금 고객인 러시아의 원조 여부를 시험하는 내용이었지만 아직 답변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 '금융 비즈니스의 천국'인 키프로스를 기착지로 활용해 비즈니스 거래의 상당 부분을 운용해온 러시아에서는 "중장기적으로 키프로스 사태는 러시아 금융에 피해보다 도움을 줄 것이며 러시아 금융의 편리성과 투명성을 투자자들에게 알릴 차례"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반면 이번 사태가 해결되더라도 키프로스가 안고 갈 타격은 분명하다. 키프로스에서 매년 1,000억달러 이상의 투자업무를 해온 한 러시아 사업가는 "금융 허브를 룩셈부르크로 옮길 것"이라고 FT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로이터는 "키프로스 은행은 지하창고가 아닌데 연금생활자 등의 정상계좌가 돈세탁 장소처럼 인식되고 있다"며 "예금계좌에 대한 세금부여 조치는 비록 취소되더라도 금융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키프로스 은행 자산은 2012년 기준 이 나라 국내총생산(GDP)의 800%를 밑도는 수준으로 인구 100만면 이하의 이 소국은 은행업을 근간으로 부를 일궈왔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