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지민구 ‘기자님’ 반갑습니다”
국회에 발을 디딘 첫날, 의원실에서 만난 한 국회의원의 첫 인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저에게 ‘기자님’이란 극존칭(?)을 써 가며 ‘90도 배꼽 인사를’ 했기 때문이죠. 아버지뻘 되는 국회의원의 ‘융숭한 대접’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사실 기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생 신분이었던 제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존칭은 “고객님(‘고객’의 잘못된 존칭)” 정도였으니 말예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국회에서 ‘90도 인사’로 존재감을 부각시키고자 노력중인 지민구 기자입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정치 현안 속에 허우적거리다 몇 개월 만에 인사 드리네요. 요새 국회 곳곳을 누비며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니면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속된 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내기 기자에 불과하지만‘기자’라는 이유로 종종 정중한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식사 자리에 가도 밥 값은 대체로 취재원이 계산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는 잠시 착각에 빠집니다. “아, 내가 ‘갑’인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특권의식이 차곡차곡 쌓여왔던 걸까요? 이런 저를 두고 영화 <부당거래>에서 류승범씨가 외쳤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줄 알아요”
실제로 일부 기자들이 취재원들의 ‘호의’와 ‘대접’을 ‘권리’로 인식할 때가 있습니다. 취재원들의 ‘호의’ 속에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담겨 있는데 이를 악용해 ‘갑질’을 하는 기자들도 있다는 것이죠. 한 선배가 “기자생활은 어깨에 ‘힘’들어가는 순간 끝나는 거야”라고 따끔한 일침을 놔주지 않았다면 저 역시 특권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릴 뻔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90도 인사’입니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낮춰야 특권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실세’로 통했던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역시 정치인들에 대한 ‘90도 인사’를 통해 예의와 겸손의 이미지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속담도 있잖아요? 또 취재원을 만날 때는 “의원님” “보좌관님” “비서님” 등 반드시 존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회 출입 기자들은 취재원에게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 의원을 비롯한 보좌진들을 ‘선배’로 통칭하는 관습이 있지만, 저는 ‘님’자를 붙여 예의를 갖춘 것이죠. 제가 한 보좌진에게 “보좌관님”이라고 했더니 “기자한테 ‘님’으로 불려보기는 처음”이라며 적잖이 당황하시더군요.
물론 권력을 견제∙감시해야 하는 기자가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최대한 예의와 겸손을 갖추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기사’로 비판하고 바로잡는 것이 기자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의와 겸손, 비판과 견제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게 바람직한 기자의 모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