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대형화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력을 보유한 기업에 매각하는 게 불가피했습니다.” (강찬수 서울증권 회장) “특화 또는 전문화하지 못한 중소형 증권사는 여건이 그나마 호전된 지금 매각이나 합병 등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게 현명한 퇴출전략입니다.”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올해 증권업계의 화두는 단연 기업 인수합병(M&A). 연초 NH증권(옛 세종증권)이 농협에 인수된 것을 시작으로 지난 7월 유진기업이 서울증권 인수에 나서는 등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다. 최근에는 최대 운용사인 대한투신운용이 세계적 금융회사인 UBS에 지분(51%)을 넘기고 외국계 합작회사로의 변신을 시도하는 등 자산운용 업계에도 M&A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이 같은 지각변동의 한가운데에는 자본시장통합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 있다. 자본시장통합법은 올해 말 정기국회를 통과할 경우 이르면 오는 2008년 하반기 이후 시행돼 금융시장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전망이다. 자본시장 통합으로 금융업무 영역의 칸막이가 제거되고 투자 대상이 다양한 멀티펀드들이 대거 나오면서 국내 금융산업은 무한경쟁의 틀로 들어선다.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투자은행(IB) 업무를 키워 골드만삭스 같은 글로벌 금융투자회사로 거듭나야 한다. 생존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으로 몸집 불리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시장 통합은 금융시장의 산업혁명”=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자본시장통합법을 ‘금융 분야의 산업혁명’으로 비유한다. 새 법안의 주안점은 증권사ㆍ자산운용사ㆍ선물회사 사이의 벽 허물기, 말 그대로 자본시장 통합에 있다. 법 시행 후 국내 증권사들은 매매업ㆍ중개업ㆍ자산운용업ㆍ투자자문업ㆍ투자일임업ㆍ자산보관관리업 등 6개 분야를 모두 취급할 수 있게 된다. 위탁수수료에 의존해온 그동안의 천수답식 경영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하게 IB 업무를 취급하는 금융투자회사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자본시장통합법 추진은 국내 자본시장의 절박한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다. 반도체ㆍ조선ㆍ자동차 등 제조업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췄으며 교역규모도 세계 10위권을 자랑한다. 하지만 금융산업, 특히 자본시장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산업과 증권회사의 경쟁력은 금융 선진국과 비교할 때 아직 걸음마 단계인데다 이나마 뒷걸음질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기업들의 주식을 통한 자금조달 규모는 2000년 14조원에서 지난해 7조원으로 절반으로 줄었고 회사채를 통한 조달규모도 2001년 87조원에서 지난해 48조원으로 55% 수준으로 급감했다. 은행 중심의 간접조달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다 금융업 가운데 증권산업이 증권ㆍ선물ㆍ자산운용업 등 더욱 세분화된 전업주의 규제를 받아 이른바 ‘칸막이 금융’으로 전락한 결과다. 증권사들은 이번 자본시장통합법 추진을 위기이자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손복조 대우증권 사장은 “위탁매매 위주의 수익구조에서 벗어나 자산관리나 IB 업무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당위와, 그럴 능력이 있느냐는 것은 다른 얘기”라며 국내 증권사들이 경쟁력 면에서 외국의 글로벌 플레이어들에 밀려 도태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자본력, 맨파워, 글로벌 네트워크 등 구체적인 실천전략을 확보해나갈 경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증권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자본시장통합법을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상품도, 조직도 무한경쟁으로 간다=칸막이가 없어지는 금융환경에 대비해 증권업계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매매, 중개, 자산운용(집합투자), 투자자문 등 업무겸영의 이점을 최대화하고 상품설계 및 개발, 상품운용, 리서치 및 리스크 관리역량을 극대화하는 전략 마련에 몰두하고 있다. 한 대형 증권사 기획전략팀 관계자는 “금융투자회사로 바뀌면 다양한 유가증권을 개발하고 그동안 선물회사에서만 취급하던 국채선물(KTB), 달러선물(USD), 상품선물은 물론 외국거래소 파생상품 등까지 업무영역을 넓혀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제성 대우증권 상품마케팅부장은 “대형 증권사들의 경우 우수한 인력을 활용해 펀드 운용 업무에도 직접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상품장벽이 철폐되면서 기존 금융상품들을 경쟁력 있는 간접투자상품으로 설계, 재판매하는 전략도 모색되고 있다. 기존에 발행한 상품들을 자기자본으로 인수한 뒤 간접투자상품으로 다시 디자인해 펀드로 재판매하는 것. 증권사는 펀드가 판매되는 대로 조기에 자금을 회수할 수 있고 투자자는 우량 상품이 편입돼 다른 증권사와 차별화된 펀드에 가입,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김병석 우리자산운용 팀장은 “증권과 실물자산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멀티애셋펀드의 경우 금융투자사마다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면서 주력상품으로 내세울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대형 금융투자사로의 변신을 위한 조직개편 움직임도 활발하다. 최근 현대증권은 직접투자(PI)본부를 신설해 IB 업무를 강화하기로 했다. 굿모닝신한증권은 IB영업본부를 개편하고 2008년까지 ‘한국형 IB’ 모델을 완성하기로 했다. 대우증권도 IB본부 내 PI팀을 운영해 자본 재투자를 통한 수익률 제고에 나서고 있다. ◇‘자기 자본 5조원으로 늘려라’ 특명=증권연구원은 2010년 국내 주식 및 채권발행시장 규모가 지난해 대비 2~3배 늘어난 107조~157조원에 달하고 국내 M&A시장도 지난해 대비 3배가 넘는 65조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했다. 규모가 커진 시장에서 대형화는 필수다. 증권사들은 업무 영역간 통합에 이어 증권사간 상호 통폐합과 구조조정을 통해 몸집 불리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한 증권사는 내부 컨설팅 보고서에서 “사업형태가 비슷한 선물회사는 대부분 증권사에 흡수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10개 정도의 증권사가 금융투자회사로 전환할 것으로 예측된다”며 “2단계로 4~5개 대형사들이 금융투자회사들간 M&A를 통해 대형사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형 IB로 성장하기 위한 증권사들의 행보도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에 따르면 현재 국내 증권사 40곳 중 3월 말 기준 자기자본이 1조원을 넘는 곳은 우리투자증권ㆍ삼성증권ㆍ대우증권ㆍ한국투자증권ㆍ현대증권ㆍ대신증권 등 6곳에 불과하다. 특히 6곳의 평균 자기자본은 1조6,931억원으로, 동북아 금융시장의 경쟁상대인 노무라ㆍ미쓰비시 등 일본 5대 대형 증권사의 평균 자기자본이 4조4,000억원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현재의 자기자본이나 자본금 규모가 3배 수준에 달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우증권은 자기자본을 2010년까지 현재 1조7,300억원 수준에서 5조원으로 늘릴 계획을 세웠으며 우리투자증권ㆍ대신증권 등도 자본확충ㆍ자본제휴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동양종금증권도 6,000억원 수준의 자기자본을 내년 3월까지 1조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 자통법 시행전 '몸살' 이해당자자 갈등에 좌초 우려 목소리도 자본시장통합법을 둘러싸고 벌써부터 이해 당사자간의 샅바싸움이 치열하다. 이로 인해 개별 상품이나 개별 업계간 이해득실 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자본시장통합법은 시작되기도 전에 좌초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당장 현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특수성을 고려해 개별법을 적용해온 특정 펀드 상품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이다. 선박펀드는 국내 선사의 선박 확보를 돕기 위한 금융지원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세제혜택이 등이 부여되고 장기투자가 법제화되면서 투자자들의 투자수익 보장뿐 아니라 해운사업 활성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선박펀드에 자본시장이 동일한 조건과 규제로 통합돼야 한다는 취지의 자통법이 적용될 경우 당장 세제혜택이 사라지고 단기상품 위주의 시장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선박펀드를 담당하는 해양수산부 해운정책과의 김태훈 사무관은 "전문지식도 없는 운용사가 단기상품 위주로 시장을 공략할 경우 투기성 자금만 몰려들 것으로 우려된다"며 "전문지식을 갖춘 운용사도 펀드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시장 특성을 고려해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박운용회사의 한 고위관계자도 "결과적으로 부실 펀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로 인해 관련 산업이 위축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선박펀드 외에 부동산펀드 등 그동안 별도법이 적용돼온 펀드들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어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소액결제 허용 여부를 놓고 벌어진 증권업계와 은행업계간의 해묵은 신경전도 진정은커녕 더욱 악화되고 있다. 금융투자회사의 소액결제가 허용될 경우 증권업계로 대표되는 금융투자회사들의 고객 서비스 경쟁력은 강화되는 반면 은행업계는 위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수 증권협회 증권산업지원부 이사는 "소액결제 허용은 소비자의 편익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증권사의 종합자산관리계좌(CMA)를 활성화하게 될 것"이라며 "증권사의 대형화ㆍ투자은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만큼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반면 은행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이용자 편익을 내세우고 있지만 결제 등을 통한 수수료 수입을 노린 측면이 더 강하다"며 "소액결제는 은행 고유의 업무로 이를 다른 금융사에 허용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은행 저축성 예금계좌의 평균이율은 0.2%선으로 CMA 계좌의 평균이율 3% 중반과 비교하면 15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투자회사에 소액결제가 허용되면 저축성 예금계좌에서 금융투자회사로의 자금이동이 급격히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안정성만 앞세워 효율성과 고객 편의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일부 진통이 있더라도 금융산업이 발전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 국민연금의 5%룰 적용 문제를 놓고 재정경제부는 시장 투명성 확보 차원에서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의 투자 포트폴리오 노출로 증시 불안정성을 야기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또 은행채 발행 때 공시를 의무화한 데 대해 은행업계는 시장금리 움직임에 따라 유동적으로 은행채를 발행하기 어려워진다며 반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