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현실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여행을 떠나는 배경에는 자신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현실의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오늘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짐을 꾸린다. 산울림 소극장 창립 20주년 기념작인 모노드라마 ‘셜리 발렌타인’은 48세의 평범한 중년 여성이 이혼한 친구의 권유로 떠나는 그리스 여행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인생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는 것이 줄거리다. 94년 국내 초연당시 무대에 섰던 손숙씨가 다시 셜리 발렌타인역을 맡았다. 라이선스 공연으로는 처음인 이번 무대는 86년 영국 에브리맨 극장 초연당시 예술감독이었던 글렌 월포드가 연출을 맡아 보다 깔끔하고 경쾌한 셜리를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은 다 커버리고, 남편은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저 직장에서 하루종일 시달린 몸과 마음을 편히 쉬고 싶어하는 평범한 남편. 그래서 그는 혼자다. 집에서 혼자 수다를 떨 때는 벽에게 말을 걸 정도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식사를 준비하기 전에 마시는 한잔의 와인. 벽을 넘어, 남편을 떠난 인생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결혼한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셜리 브레드쇼가 된 그녀가 그리스에서 만난 것은 그녀 자신 셜리 발렌타인이었다. 극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대사. 셜리가 20년 이상의 결혼생활에 대해 혼자 넋두리를 하면서 ‘결혼은 중동문제 같은 거야. 해결책은 없어. 여기저기 잡아당겨 보다가, 이 부분은 양보하고 저 부분은 관철하고, 돌발상황이 벌어지면 적절하게 대처해야 해.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고개를 숙이고 통금을 지키며 정전협정이 유지되기를 바랄 뿐이지. 내 인생 자체가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어. 신에 대한 범죄. 왜냐하면… 충분히 살지 않았거든. 내 안엔 그렇게 많은 게 들어있는데 난 이렇게 작은 삶을 살았어 ’ 등 대목대목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사에서 섬세한 중년 여성의 감정변화가 잘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가족과 남편에 대한 배려도 담겨있다.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데는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중년 여성의 ‘자아실현’이라던가 ‘여성해방’ 등을 거창하게 외쳐서가 아니다. 꿈을 잃고 현실에 지친 모든 현대인에게 여행에서 자신을 발견한 셜리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져서 일 것이다. 산울림 소극장. 5월17~7월17일. (02)334-5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