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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서거] 재임중 공과는
반칙·특권 타파··· 남북관계 개선도 큰 업적
권대경 기자 kwon@sed.co.kr
63년 인생 역정 가운데 지난 2003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기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좀더 시간이 지난 뒤에 국민과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되겠지만 노 전 대통령 서거로 대통령 노무현을 되짚는 시선은 매우 다양한 것이 사실이다.
◇'반칙ㆍ특권' 타파…자유무역협정(FTA)ㆍ정상회담 '역사의 획' 그어=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최대 목표는 지역주의 타파였다. 이 같은 집념으로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이를 포함해 권위주의 청산과 남북 화해협력 등 다양한 화두를 제시해 이 중 일부는 입법화를 거쳐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돼야 한다"며 구태정치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던 특권과 반칙에 맞서 싸웠다.
이런 노력으로 참여정부 이래 정경유착이나 정언유착은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정치문화도 상당 부분 정화됐다는 데 이의를 달 이는 없다. 지지층의 반대를 무릎 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시킨 점과 임기 중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탄생시킨 외교력도 빼놓을 수 없다.
노 전 대통령 업적 중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남북관계 개선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있고 앞서 노 전 대통령 임기 중인 2006년에는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때 긴장관계가 조성됐지만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은 뒤 육로로 평양을 방문한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잦은 설화 따른 정치갈등, 부동산 정책 아쉬워=끊임없이 승부수를 던진 노 전 대통령의 스타일로 인해 임기 내내 정치적 갈등이 이어졌다. 걸러지지 않은 돌발 발언에 따른 잦은 설화(舌禍)와 계속된 정치실험은 국민들로 하여금 '개혁 피로감'을 느끼게 했고 결국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참패로 이어졌다.
때이른 레임덕에 시달린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한 국가보안법 폐지 등 이른바 '4대 개혁 입법' 시도는 우리 사회 진보ㆍ보수 진영의 격돌을 더욱 격화시키는 폐단을 낳았다. 더 큰 문제는 경제였다. 2003년 카드대란을 시작으로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에 육박하는 등 정부가 판단한 경제지표와는 전혀 다른 실물경제 위기로 정부ㆍ여당의 지지도는 추락세를 면하지 못했다.
또 '버블 세븐'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부동산 가격이 치솟은 점은 참여정부 과오의 첫번째로 꼽힌다. 정부는 5ㆍ8대책, 10ㆍ29대책, 8ㆍ31대책 등 연이어 극약 처방을 내놓았으나 오히려 부동산 폭등세는 전국으로 확대됐다.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부동산만은 확실하게 잡겠다"고 했으나 1년 뒤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게 없다"며 부동산 정책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종종 "새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진정 어느 쪽이었는지는 앞으로 역사가 판단해야 할 몫이 됐다.
盧 전 대통령 영정 본 분양소로 이동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24일 오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마련된 임시분향소에서 盧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이 본 분향소로 옮겨졌다. 한명숙,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영정을 앞에서 들고 뒤로 아들 건호 씨와 가족들이 따랐다./ 김해= 한국아이닷컴 고광홍기자 kkh@hankooki.com kkh@hankooki.com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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