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이같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제조물책임법의 제정을 서두르고그동안 우리나라는 미국 등 선진국과 달리 제조물책임법이 없었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소비자들이 제조물에 대한 하자를 입증해야만 제조물회사로부터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데 워낙 전문적이기 때문에 입증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어려웠었다. 따라서 사실상 소비자들이 제조물회사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법원이 지난 77년에 판결로 제조물책임을 인정하는 극히 이례적인 사례가 있었다. 대구에서 양계업을 하는 金모씨는 72년12월께 崔모씨가 운영하는 사료공장에서 닭사료 20톤을 사 닭들에게 먹였다. 그런데 3~4일후부터 닭들이 심한 탈모현상과 함께 난소가 극히 위축되는 등 이상한 증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매일 30%의 산란율을 보이던 닭들이 10여일 뒤부터 산란률이 급격히 떨어져 결국에는 도산하고 말았다. 원고 金씨는 닭사료 때문에 자신의 사업이 망했다며 사료제조업자 崔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법원은 과연 닭사료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감정인을 통해 실험을 해보도록 했다. 감정인 李모씨는 金씨가 닭들에게 먹이고 남은 사료를 10여일 정도 다른 닭에게도 먹였다. 시험결과는 金씨가 주장했던 것과 일치했다. 李씨가 먹였던 닭사료는 金씨가 보관과정에서 변질되거나 부패한 흔적이 전혀 없는 정상적인 사료로 나타났다.
대법원 제2부는 77년1월25일 金모씨가 崔모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金씨에게 승소판결을 내린 대구고법의 원심판단이 정확했다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閔文基(민문기), 李英燮(이영섭), 金允行(김윤행), 金容喆(김용철) 등 4명의 대법원 판사가 맡았다. 당시는 대법관을 대법원판사로 불렀다. 李대법원판사와 金대법판사는 대법원장을 지내고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閔대법원판사도 대법원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고 역시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으나 김윤행대법원판사는 지금 고인이 됐다. 원고 金씨를 대리해서는 김정두(金正斗)변호사가, 피고 崔씨를 대리해서는 문양(文洋)·강승무(姜昇茂)변호사가 각각 사건을 맡았다. 金변호사는 현재 고인이 됐으며, 文·姜변호사는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비록 사료에서 어떠한 불순물이 함유돼 있고 또 그것이 어떤 화학적·영양학적 내지는 생리적 작용을 해 이를 사료로 한 닭들이 난소협착증을 일으키게 되고 산란율을 급격히 저하케 한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적어도 그 사료에 어떤 불순물이 함유된 것이 틀림없어 제조과정에 과실이 있었고 이로 인해 원고가 사육하던 닭들이 산란율 감소 등의 현상을 초래하게 된 것이라는 인과관계는 입증되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재판부가 사료의 구체적 결함내용이나 그 결함과 피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불순물의 함유로 제조과정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피해발생에 관한 인과관계가 입증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판결은 제조물책임에 관해 제조자의 과실을 사실상 추정하고 피해자의 인과관계 입증을 경감시키는 대표적인 판례로 꼽히고 있다.
윤종열기자YJYU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