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신불자 엄마의 신년소망

조희제 <사회부장>

며칠 뒤면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벽을 가장 먼저 알리는 닭의 해 을유년을 앞두고 희망을 얘기하기보다는 더이상 절망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내년이 올해보다도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올해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새롭게 구성된 17대 국회는 국민에게 배신감과 좌절감만 안겨줬고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기는 서민들의 가계부를 옥죄었다. 무너지는 서민가정들 늘어 이제 국민들은 정치 얘기라면 무조건 고개를 돌리고 만다. 당동벌이(黨同伐異:같은 사람들 끼리 무리를 지어 다른 자를 공격한다는 의미)라는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를 예로 들지 않아도 정치권의 이전투구 모습에 실망을 넘어 울화통이 터진다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서민들은 이 와중에 불황의 짙은 그림자에 휩싸여 하루하루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영세상인들도 장사가 안돼 줄줄이 문을 닫으며 한숨만 쉬고 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준극빈층들의 가정붕괴 모습은 듣기에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맞벌이 부부의 아이가 굶어죽고 실직한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노부부가 세상을 등지고, 취직이 안돼 부모 뵐 낯이 없다며 젊은 청년들은 목을 맸다. 서민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신용불량자도 지난 11월 말 현재 365만여명에 이른다. 한때 400만명에 육박했던 신불자 수가 4개월째 줄어들고는 있지만 여전히 높은 수치다. 인터넷 모카페 신용불량자클럽에는 이번 겨울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걱정하는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와 있다. 이들 신불자나 빈곤층의 가정이 무너지며 가출하는 부모들도 늘어나고 있다. 개발시대에는 농촌에서 자식들이 입 하나 덜자며, 또 일자리를 찾자며 도시로 가출했는데 이제는 부모들이 가정을 포기하고 자식들을 보육원이나 노부모에게 맡기고 정처 없이 가출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일요일 빈곤층의 가정파탄이 심각하다며 긴급 생계대책을 내놓았다.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우선 긴급구호를 실시하고 나중에 법적인 절차를 밟는 ‘선보호ㆍ후처리’ 원칙을 통해 위기에 빠진 빈곤층 가정을 구제하겠다는 게 골자다. 무너져가는 빈곤층 가정의 심각성을 정부도 인정한 셈이다. 정부의 이 같은 긴급 대책은 물론 필요하다. 힘든 세파에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마지막 보루인 가정이 해체되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분배성 정책이 근본 대책은 될 수 없다. 자칫 전국민적인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실패한 농정이라는 선례를 되새겨봐야 한다. 정부가 쌀시장 개방에 대비, 농촌의 자생력을 키운다며 지난 10년간 수십조원의 혈세를 쏟아부었지만 농촌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농민들은 쌀시장 개방을 코 앞에 두고 다시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 무너져가는 서민가정을 다시 세우려면 일자리를 갖고 자신의 땀으로 번 소득으로 빚도 갚고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스로 책임지며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줘야 한다. 일자리 부터 만들어내야 법원이 개인회생을 받아줘 희망을 갖게 된 한 간호사는 “삶의 기회를 다시 한번 얻은 것과 같다”며 감격해 하면서 “무엇보다 일을 계속하면서 신불자에서 탈출하게 됐으니 내핍생활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신불자의 오명을 벗어나는 것 못지않게 빚 독촉 없는 일자리가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이다. 새해 국정과제를 아무리 열거해도 결론은 경제다. 침체된 경기의 불씨를 되살리고 지갑 닫은 부자들이 돈을 자유롭게 쓰게 해서 돈줄기를 정상적으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 서민들에게 일자리와 돈 벌 기회가 주어지고 스스로 생활을 책임질 수 있게 된다. “내년에는 내 이름으로 된 개인통장 하나 만들 수 있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빈다”는 어느 신불자 엄마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빌어본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