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김인영 특파원】 도이체 방크의 뱅커스 트러스트 인수, 엑슨과 모빌의 합병, AT&T와 IBM의 사업 맞교환 등…. 세계적인 기업들간에 짝짓기가 다시 불붙고 있다. 국경을 뛰어넘는 대형 M&A의 이면을 보면 단순히 덩치를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비주력 업종을 청산함으로써 전문업종에 주력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하는 게 더 중요한 목적이다.시큐어리티 데이타사의 조사에 따르면 올들어 12월초까지 전세계에서 진행된 M&A 거래금액은 2조3,100억 달러에 이른다. 이는 지난해 1조6,000억 달러를 훨씬 넘는 것이다. 4년전인 94년에 전세계 규모가 5,603억 달러였던 것에 비교하면 이제 M&A는 글로벌 사회에 큰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21세기를 앞두고 진행되고 있는 국제적인 M&A 추세는 한국 기업에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업종 전문화= 미국 최대 전화회사인 AT&T는 지난 8일 IBM의 데이타 네트워크 사업을 50억 달러에 인수했다. AT&T는 올들어 케이블업체인 TCI, 무선통신회사인 뱅가드 셀룰러사를 인수했다. AT&T는 경쟁사인 MCI-월드컴의 도전을 뿌리치기 위해 무자비하게 기업인수 욕심을 펼치고 있지만, 90년대를 거치면서 하나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바로 전화사업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90년대초만 해도 AT&T는 통신사업 이외에도 전화기를 직접 만들었고, 국제전화용 인공위성도 운영했다. 관련 분야이기는 하지만 전혀 운영체계가 다른 사업을 운영하다보니 경영의 효율성을 기할 수 없었고, 오히려 모기업의 적자만 누적됐다. 결국 AT&T는 NCR·루슨트 테크놀러지 등 비주력회사를 매각했다. AT&T는 올들어 통신분야만 인수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컴퓨터 기기 분야 인력을 IBM과 사업 맞교환을 해 넘겨주었다.
MCI-월드컴도 비주력 분야인 컴퓨터 서비스 사업을 EDS사에 매각키로 함으로써 경쟁사인 AT&T의 변화를 따라갔다.
독일 최대은행인 도이체 방크가 미국의 뱅커스 트러스트를 인수, 뉴욕 월가를 놀라게 했다. 러시아 위기에서 가장 많은 돈을 떼인 도이체 방크가 어디서 자금이 나서 미국에 진출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이체 방크는 미국 은행 인수에 100억 달러를 들였지만, 동시에 독일내 비주력 투자부분을 과감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도이체방크는 다임러-벤츠의 지분 21.8% 등 모두 400억 마르크(240억 달러)의 기업 주식을 과감히 매각, 금융분야에만 주력함으로써 뉴욕 월가 은행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다운 사이징= 연초 시티은행과 트래블러스 그룹의 합병으로 탄생한 시티그룹은 15일 전체 인력의 6%에 해당하는 1만400명의 인원을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2000년까지 9억달러의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목표다.
석유회사 엑슨과 모빌의 합병에서도 양사는 정부의 승인이 나는대로 인력 10%를 줄일 방침이라고 밝혔다. 유가가 40% 이상 떨어지는 상황에서 석유 메이저가 살 수 있는 길은 인력과 불필요한 사업을 줄이는 길이다. 그들은 합병을 선택했고, 합병을 통해 중복부문을 과감히 잘라낼 여력을 갖게 됐다.
기업 합병과정에서 가장 크게 위축당하는 곳은 근로자들의 고용조건이다. 80년말 미국 기업들이 대량으로 인원을 정리했을 때 노조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미국 근로자들은 10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글로벌 경제의 변화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고용인력 축소를 이제는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철강노련의 조지 베커 위원장은 인터뷰에서 『시장 상황이 나빠져 고용인력을 줄일때는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며 노조의 현실적 대응을 강조했다.
미국 기업들은 대량의 정리해고자를 쏟아내지만,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산업분야가 창출됨으로써 이들 인력을 수용하고 있다. 노조의 유연성은 바로 경기 호황과 경제운영의 탄력성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