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90년대 초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을 통해 (사회주의·권위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다. 더불어 서구문명이 인류 보편적인 유일한 문명으로 그 행복한 종점에 도달했다고 단정했고, 이는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 군사·정치적으로는 네오콘(신보수주의)으로 표출됐다. 하지만 이 기세등등했던 네오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라크전쟁에서, 교조주의적인 신자유주의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빠르게 침몰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서양 모두의 가치·전통에서 살펴온 경희대 김상준 교수는 이번 책 '진화하는 민주주의'에서 이런 서구 중심의 일방적 관점을 비판한다. '역사의 종언'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늘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올 뿐이라는 것. 나아가 세계 여러 문명이 동등하게 발전했던 '초기 근대'와 서구가 세계를 지배한 '본격 근대'를 지나, 이제 비서구 문명권이 세계사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후기 근대'에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그간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수동적 입장으로 봐온 중국·인도(아시아), 브라질(남미), 이란·이집트(범이슬람권) 등의 국가들이다. 나아가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돼 유럽에서 발전하고, 19~20세기 영국·프랑스·미국에서 완성돼 비서구권으로 이식됐다는 관점을 벗어나는 주장을 편다.
심지어 15세기 말 서유럽의 아시아·아메리카 진출 시점을 시작으로 보는 500년 자본주의 체제도 부정한다. 앞서 언급한 '초기 근대' 시기는 비자본주의가 뒤섞여 그저 일부 서구 국가의 자본주의적 경향이었을 뿐, 민주주의와 비슷하게 빨리 잡아야 18세기 말, 200년 정도밖에 안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인도의 민주주의 행보는 서구권에서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가깝다. 철저한 신분제적 제약을 두는 카스트제도가 관습적으로 각인된 인도에서는 1993년 마을 단위 자치기구에서 국회까지 연결되는 혁신적 자치제도 '판차야트 개혁', 서구보다 과감한 소수자 배려 할당제도 '만달리즘'을 비롯해,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이 직접 예산을 짜는 '주민자치예산제도'까지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혁신은 이미 1977년 보수당 국민회의당의 대선 참패 이후 차곡차곡 진행된 것으로 '바니안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인도판 '풀뿌리 민주주의'라 불릴 혁신은 이미 인도 내부에 내재하여 있었다. 강력한 신분주의적 제약이 있었다지만, 카스트제도하에서 왕은 고대부터 브라만(사제계급)보다 아래였다. 1977년 대선에는 빈곤층, 낮은 신분층, 심지어 불가촉천민(달리트)까지 소외계층이 대거 참여했고 결국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2020년 국가 GDP 규모로 미국을 누르고 세계 1위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변화의 뿌리에는 수억 명의 농민들이 있다. 집단농장이 아닌 자투리땅에서 나온 잉여 소출이 밑바닥 시장경제를 흔들고, 결국 1979년 '바오찬다오후' 즉 개별농가 책임생산제도로 정착시킨다. 또 공직자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역자치에 나서는 움직임은 1987년 '촌민위원회법'으로 관철되고, 이는 향·진 단위를 넘어 중앙으로 서서히 직접선거를 퍼뜨리고 있다.
'2002년 전과 후의 브라질은 다르다'고 할 정도로 브라질의 변화는 놀랍다. 독재와 고문이 판치던 후진국에서 탄탄한 민주국가로 거듭났다. 2011년을 기점으로 경제규모는 영국을 제치고 세계 7위로 올라섰다. 이는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그리고 그의 최대 라이벌이던 전임 대통령 카르도주의 역할이 크다.
무엇보다 빈곤가구 현금지원정책 '보우사 파밀리아'의 성공으로 룰라 집권 8년간 2,000만명의 국민이 빈곤층을 벗어났다. 절대 빈곤층도 12%에서 5% 이내로 감소했다. 소농민 저금리 신용대출, 최저임금의 지속적 인상, 각종 노동권에 대한 보호, 빈곤층의 영양을 개선하는 '농촌영양정책', 비정규직에 대한 연금 개혁 역시 큰 효과를 가져왔다. 복지 남발로 나라를 말아먹으리라던 반발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2008년 금융위기를 가장 빠르게 벗어난 국가로 손꼽힌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현시점에서 소위 '비서구 민주주의'가 보다 대등한 문명관계와 보다 높은 수준의 보편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로 냉전이 종식됐지만, 그 냉전구도를 벗어나는 사건들이 지속되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2011년 '재스민 혁명'을 위시한 포스트 이슬람 민주주의 현상, 인도의 바니안 민주주의, 브라질을 위시한 남미 민주세력의 성장사 등 새로운 민주주의 공간을 창출하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다. 포스트 냉전시대에 민주적 생동력과 정치적 상상력이 활발히 피어오르고, 그 가운데 비서구권이 새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