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당초 예상을 크게 웃도는 성과를 내며 출발점에 섰다. 중국 언론들은 일제히 중국 경제외교의 승리라고 평가하며 미국이 쥐고 있던 금융 주도권이 다원화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31일까지 AIIB 신청을 한 국가는 모두 47개국. 애초 브릭스와 아시아 내 개발도상국 등 친중 국가들을 중심으로 35개국 정도의 가입이 예상됐지만 3월 이후 상황은 돌변했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내 미국 동맹국들이 잇따라 가입신청서를 내밀었고 한국까지 가입을 선언했다. 창립회원국 모집 마지막 날인 31일에도 키르키스스탄이 막판 가입신청을 하고 대만과 스웨덴이 신청절차를 밟고 있다. 장우잉 사회과학원 국제경제연구센터 연구원은 "AIIB가 예상을 뛰어넘는 인기를 끄는 것은 인프라 투자를 통한 경제 활성화의 필요성을 세계 각국이 공유하기 때문"이라며 "AIIB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 국가경제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동맹국들의 AIIB 가입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경제동맹국의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미국과 대립하는 중국이 주도하는 기구지만 아시아 지역 인프라 투자에 따라오는 이익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WSJ는 덧붙였다. 바이밍 중국 상무부 국제시장연구센터 부주임은 "유럽의 채무위기가 끝나지 않은 가운데 달러화 가치 상승이 유로화 하락을 압박하는 상황"이라며 "양적완화 이후 유럽 국가들은 경제회복을 위해 또 다른 돌파구가 필요한데 AIIB가 이러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일본은 끝까지 눈치를 보겠다는 계산이다. 일단 결정을 보류하기는 했지만 가입을 거부하겠다고 확실히 선을 그은 것도 아니다.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은 이날 기자들에게 "(일본은 AIIB 참여에 대해) 지극히 신중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AIIB 운영의 투명성 확보 등이 일본 참여의 전제가 되는 만큼 중국의 대응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처럼 일본이 머뭇거리는 것은 AIIB를 이용해 중국이 영향력을 키울 경우 아시아 역내에 있는 일본의 지위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AIIB를 두고 미국과 중국의 온도차는 여전하다. 민감한 시기에 중국을 방문한 제이컵 루 미 재무장관은 전날 리커창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루 장관은 일단 "미국은 AIIB를 환영하며 인프라 건설에 도움이 될 만한 지원을 하겠다"며 "협력은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이고 경제적인 대화 혹은 세계은행(WB)과 AIIB 등 두 국가 간에 공인된 메커니즘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루 장관은 다른 한편으로 AIIB의 약점인 투명성 문제를 거듭 강조하며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중국 언론들은 미국이 현재로서는 AIIB 가입 가능성을 일축했다고 분석했다. 리 총리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배구조 개혁을 언급하며 IMF의 특별인출권 바스켓에 위안화가 포함되도록 미국이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 재무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홍콩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적절한 안전장치 없이 신용을 확대하고 WB와 IMF의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는 AIIB를 반대한다"며 "국제금융기구로서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역할을 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눈길을 끌었던 북한의 AIIB 가입은 중국의 거부로 무산됐다. 가뜩이나 AIIB의 투명성에 대한 우려가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 북한 가입이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외교소식통은 "아무리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구라고 해도 불법적 핵 개발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에 인프라 투자 혜택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