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위 압박에 속으론 '부글부글'…대기업 '상생 스트레스'


전방위 상생 압박에 포위된 대기업들의 스트레스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7월22일 이명박 대통령의 대기업 캐피탈사 고금리 질타를 신호탄으로 친서민ㆍ상생 드라이브가 걸린 이후 대기업들의 온 신경이 한달 넘게 대ㆍ중소기업 상생에 쏠려 있다. 구매, 전략 등 일선 현업부서는 물론 최고 경영진과 오너들까지 나서 상생을 알리느라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현대기아차는 1일 오전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이 참석하는 상생협력 선포식이 비전 선포식과 겹치자 정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비전 선포식을 연기해 버렸다. 기업 본연의 경영활동이자 향후 10년을 준비하는 중요한 행사가 뒷전으로 밀려 버린 것이다. 재계에선 정몽구 회장이 느끼는 부담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 하다고 입을 모은다. ◇겉으론 호응, 속으론 부글부글=주요 대기업 고위 임원들은 요즘 상생 얘기만 나오면 “정부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원래 더 많이 사원을 뽑으려 했던 거고, 협력업체 지원도 늘릴 계획이었다”며 앵무새처럼 말한다. 한달 전 정부의 상생 밀어붙이기를 비판하던 모습과 전혀 딴판이다. 또 다른 대기업 임원 역시 “우리는 전부터 해오던 대로 상생을 잘 하고 있다”며 판에 박힌 말만 되풀이한다. 정부의 상생 기조를 부정적으로 말했다가 크게 곤혹을 치른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겉으론 정부의 상생 방침에 적극 호응하는 듯 하지만 대기업들의 속내는 전혀 다르다. 한 대기업 CEO는 “국내만 생각하지 말고 글로벌을 생각해야 한다”며 “솔직히 국내에서 사업을 하고 싶지 않다”고 털어놨다. 일방적으로 대기업을 몰아 부치는 게 해도 너무 한다는 얘기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 아니냐”며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피로감을 호소했다. 정부 눈치를 보느라 예정돼 있던 회사 행사를 연기해 버린 건 현대기아차가 처음이 아니다. LG화학도 지난달 3일 그간의 상생 성과를 발표하려다 갑자기 미뤘다. 바로 전날 2차전지 소재 연구 참여업체 선정과정에서 중소기업들을 더 많이 참여시킨 삼성SDI 컨소시엄에 밀려 떨어지자 중소기업과 협력이 잘 안 되는 기업으로 낙인 찍혔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산업계에서는 ‘사상 최대 실적’, ‘사상 최고’, ‘영업이익률 최고’와 같은 화려한 단어들이 사라져 버린 점도 대기업들의 상생스트레스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눈치보기 속엔 공포가=사실 상생협력은 노무현 정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재벌 총수들은 수 차례 청와대로 불려가 노 전 대통령과 상생협력 회의를 했고, 대기업마다 상생방안을 발표했었다. 그때도 대기업들은 상생스트레스가 컸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요즘 상생스트레스에 비하면 행복했던 시절이란 말마저 나온다. 이유는 달라진 기업환경, 정확히 말하면 권력의 속성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기업들이 느끼는 상생스트레스는 가히 공포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산업계에서는 대통령 레임덕이 없다”며 “권력이 무섭다”고 강조했다. 상생 합격점을 받으려 사력을 다 하는 대기업들에겐 상생스트레스가 곧 생존스트레스라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대기업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이 같은 상생 윽박지르기가 ‘정치 논리가 경제를 망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지적한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내버려두면 잘 할 수 있는 것을 정부가 개입해 망치는 일이 많다”며 “대-중소기업은 서로 윈ㆍ윈 관계이기 때문에 상생협력을 하게 되는데 정부가 강요하면 역효과가 난다”고 말했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박사는 “기업이 생산성을 높여 이익을 더 많이 내고 성장을 해야 고용이 늘고 중소기업도 동반 성장할 수 있다”며 “강압적으로 고용을 늘리게 하면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져 오히려 일자리가 축소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대기업은 복지기관이 아니라 생산을 하고 이익을 창출하는 조직”이라며 “대기업 보고 실업자 해결을 하라고 하는 건 마치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선수에게 한국의 육상이 뒤쳐져 있으니 육상도 같이 해달라고 하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정기화 전남대 교수(경제학)는 “미국은 기업내 생산이 많지만 한국과 일본은 협력업체로부터 대부분 부품을 조달하는 구조”라며 “정부가 납품방법이나 계약내용, 마진까지 일률적으로 강요하면 대기업들은 부품을 내부 생산하거나 글로벌 아웃소싱을 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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