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고국에서 짐을 싸 들고 훌쩍 외국으로 떠나는 부유층, 이른바 '리치노마드(rich nomadㆍ부유한 유목민)'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부자증세의 압박을 못 이겨 해외로 도피하는 프랑스인들부터 사회 체제에 대한 불만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는 중국의 엘리트 부유층까지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재정압박을 받는 선진국 정부들의 '부자세' 도입이 확산되고 국제사회 곳곳에서 정세불안이 심화하는 가운데 부자들의 해외유랑이 앞으로도 더욱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13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해외로의 자금 순유출이 지난해 10월부터 11월 사이 급증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부유층의 소득세에 대한 75% 과세방안을 내놓은 시기다. 실제 프랑스에서는 이 시기를 전후해 '슈퍼리치'로 불리는 최고소득층이 과세를 피해 프랑스를 떠난다는 소식이 줄을 이었다.
9월에는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벨기에 시민권을 신청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최근 프랑스의 대표 배우인 제라르 드파르디외는 부자증세에 반발해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지난해 이웃나라인 벨기에로 귀화를 신청한 프랑스인은 전년 대비 두 배인 126명에 달했다. 내역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세율이 낮은 곳을 찾아 짐을 싼 리치노마드가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 부자들의 해외망명을 부추기는 주된 요인은 높은 세율이다. 최근 발표된 유엔 중남미경제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슈퍼리치들에게 부과되는 소득세율은 미국 39.9%, 남미지역이 평균 37.5%에 그치는 반면 북유럽은 60%에 달한다. 보고서를 작성한 칠레 경제학자인 안드레스 솔리마노는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슈퍼리치는 그냥 짐을 싸서 떠나버리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물론 소득세율이 부의 해외유출을 부추기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드파르디외가 찾아간 러시아의 경우 소득세율은 13%로 낮은 수준이지만 러시아경제와 사회체제에 대한 불안 등을 이유로 부자들이 해외로 빼돌리는 자산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공식 집계된 러시아의 자본 순유출은 지난 2011년 현재 800억달러에 달했으며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당선 이후 해외차입이 늘어 순유출 규모는 줄었지만 개인 부유층의 자산유출은 끊이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러시아 개인 자산가들이 해외에서 구입한 부동산 총액이 100억달러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전했다.
하지만 리치노마드가 가장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국가는 단연 중국이다. 지난해 해외시민권을 취득한 중국인은 15만명으로 이 가운데 상당수는 고학력ㆍ고소득인 중산층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서구 선진국으로 자산을 빼돌리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11년 4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중국인들이 거액의 현금보유를 신고하지 않은 채 캐나다로 입국하려다 적발된 금액이 총 1,290만달러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인도 예외는 아니다. 재정난 해소를 위한 부자증세를 추진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리치노마드는 페이스북 공동 창업자인 에두아르도 새버린이다. 그는 거액의 세금을 피하기 위해 지난해 5월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현재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리치노마드는 세계적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이 오는 2015년부터 부자들에 대한 소득세율을 현행 40%에서 45%로 인상하기로 했으며 한국에서도 부자증세의 필요성이 거론되는 등 세계 각지에서 경기부양 재원 확보를 위한 부유층 공략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프랑스의 자본유출 사태를 지켜본 일본 정치권에서는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가 부유층의 해외도피를 부추겨 오히려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로 소득세 최고세율의 기준선을 높이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