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따르라" 그리스 돈줄 죄는 트로이카

ECB "협상 성공 기대 못해" 그리스 국채 대출담보 승인 중단
EU는 구제금융 연장 압력 넣어
독일도 "빚 삭감 검토대상 아냐"… 주가 급락 등 금융시장 요동


그리스 새 총리와 재무장관이 '채무탕감' 순방에 나선 가운데 국제채권단 트로이카(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유럽연합)가 그리스의 돈줄을 조이기 시작했다. 최근 반짝 안정세를 보였던 그리스 금융시장은 다시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고 국채금리가 상승하는 등 요동을 쳤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4일(현지시간) 유럽중앙은행(ECB)은 오는 11일부터 정크 등급인 그리스 국채를 더 이상 대출담보로 받지 않겠다고 성명서를 통해 밝혔다. ECB는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과 관련해) 현재로서는 성공적 결론을 기대할 수 없다"며 "이번 결정은 현행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ECB 기준에 따르면 정크 등급 채권은 원칙적으로 담보로 인정되지 않지만 지난 2010년의 구제금융 합의로 그리스 국채는 예외적으로 대출담보 승인을 해왔다. 이에 따라 그리스 은행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ECB로부터 0.05%의 초저리로 자금을 융통해왔다.

대신 ECB는 이날 그리스 중앙은행에 50억유로의 긴금유동성지원(ELA)을 승인했다. 그리스 은행들이 ECB로부터 직접 대출을 받는 대신 ELA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면 금리가 1.55%로 높아진다. 또 정크 등급 국채 보유에 따른 리스크도 은행들이 떠안아야 한다. 그만큼 그리스 은행들의 건전성이 악화되고 뱅크런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이날 ECB의 조치는 당장 그리스 은행의 생명줄을 끊은 것은 아니지만 목줄을 조여가는 것으로 해석된다. ECB는 2012년 그리스 정부와 민간 채권자들 간 협상이 난항을 겪을 때도 국채담보대출 중단으로 그리스를 압박한 적이 있다. 채무국인 그리스가 엇나갈 때 당겼던 일종의 고삐인 셈이다.

ECB는 또 그리스의 국채발행 한도 100억유로 증액 요청도 거절했다. 그리스는 이달 말 종료 예정인 기존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연장하지 않고 새 협상을 체결할 때까지 필요한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이 같은 요청을 한 바 있다.

ECB의 경고는 이날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와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 간 회담이 열린 뒤에 나와 그리스에는 더 큰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회담 이후 바루파키스 장관은 "회의에서 성과가 있었다"고 밝혔다. 부채탕감과 반긴축 정책을 약속하며 그리스 총선에서 승리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바루파키스 장관과 함께 취임 일주일 만에 이탈리아·영국·프랑스 등 7개 국가와 도시를 돌며 구제금융 재협상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이날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치프라스 총리와 만난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과 마르틴 슐츠 EU 의장도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우호적 분위기 속에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는 덕담 수준의 이야기를 했으나 외신들이 전하는 막후 분위기는 달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익명을 요구한 EU 관료의 말을 인용해 EU가 이달 말 종료 예정인 구제금융 프로그램의 시한을 현재 조건대로 연장하는 방안에 대해 압력을 넣고 있다고 전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이날 "그리스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대목에서 EU 국가들의 입장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못 박았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이날 치프라스 총리와의 회담에서 "룰을 지키는 게 모두에게 중요하다"며 "물론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고 블룸버그 등은 전했다. 그리스가 코너에 몰리면서 금융시장은 다시 출렁였다. ECB 발표 직후 뉴욕증시의 그리스20상장지수펀드(ETF)는 10.4% 하락했으며 유로화도 1.2% 떨어진 유로당 1.1338달러를 기록했다.

또 그리스 국채금리도 상승하며 이번주 말 돌아오는 10억유로의 국채를 만기 상환하기 위해 그리스 정부가 발행한 8억1250억유로의 국채 금리가 2.75%로 책정됐다. 1월만 해도 금리는 2.3%였다. 외신들은 그리스와 채권국 간 대결이 본격화되는 시점은 5일(현지시간) 바루파키스 장관과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의 만남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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