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미지급 임금통장 수만 개가 발견됐다. 징용피해자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임금 대부분을 우체국에 강제 저축시키고는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지난 1950년대 초반 우정성이 전국노동기준국을 통해 각 기업으로부터 모은 것이라는 정부 문서도 나왔다. 일본 정부가 숨겨온 부끄러운 역사가 양심적 시민단체에 의해 발가벗겨진 셈이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한국 정부는 물론 징용피해자 등 모든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우리 대법원은 지난해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 등으로 인한 손해배상은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정반대의 판결을 내놓았다. 이어 서울고법은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ㆍ옛 신일본제철)에 소송을 낸 징용피해자 4명에게 1억원씩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신일철은 상고했지만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내려지면 따르겠다는 뜻을 일본 언론에 밝혔다. 포스코 지분 등 한국 내 자산이 압류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딴죽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침략행위 자체를 부인해온 아베 신조 정권의 각료들은 "한일 간 재산청구권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 개별 배상은 불가하다"며 신일철을 압박했다. 대법원이 배상 확정 판결을 내리거나 신일철의 자산압류 등 강제집행에 나설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거나 한일투자보장협정 등을 내세워 외교ㆍ무역보복을 할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정부는 진실을 숨겨온 일본 정부에 엄중하게 책임을 묻고 징용피해자ㆍ유족들이 임금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다만 한일관계가 벼랑 끝으로 몰리지 않게 다자ㆍ양자 차원에서 외교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도 최고재판소가 2007년 중국인 징용피해자가 낸 소송에서 "개인의 청구권 행사는 불가능하지만 각각의 배상 청구에 대한 피고(징용 기업)의 자발적 피해구제는 무방하다"고 한 판결의 취지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