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마한 실세 총리에 이어 요즘은 총리 권한대행이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해찬 전 총리는 훌륭한 분, 균형 잡힌 평가와 분석이 있었다면 이번 같은 일은 없었을 것” 운운하며 총리는 훌륭한데 국민이 잘못됐다는 투다.
국민들이야 산불로 발을 동동 구르든 말든, 수해로 집이 몽땅 떠내려가든 말든, 철도 파업으로 출근길이 묶이든 말든 나는 골프만 치면 된다, 접대 골프면 어떻고 오리발 골프면 어떻고 업자들과 치면 또 어떠냐는 극도의 오만함이 훌륭하다니 설마 이 전 총리의 전철을 밟겠다는 뜻은 아니길 빈다.
정말 걱정되는 것은 부총리로서 챙겨야 할 중대한 경제 현안에 대한 인식이다. 겨우 한숨 돌렸지만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인 KT&G 사태, 소버린, 칼 아이칸에 이은 세계적인 기업사냥꾼 스틸파트너스의 한국 진출 등으로 우리 우량기업들의 경영권이 풍전등화인데도 “지금의 인수합병(M&A) 관련 규정은 공격자와 방어자간 균형이 맞고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부합한다”며 “더 이상의 M&A 방어조치는 없다”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큰일이다. 선진국의 M&A 규제는 공격도 막고 방어도 제한하는 영국형, 공격도 허용하고 방어도 허용하는 미국형, 공격은 막고 방어는 최대한 허용하는 EU형으로 나뉜다. 우리나라는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형적인 구조다.
의무공개매수를 강제하지 않아 공격을 허용한다는 점에서는 미국형과 유사하지만 대표적인 방어수단인 포이즌 필, 골든 셰어, 차등의결권, 복수의결권 중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미국과도 다르다. 즉 공격은 맘껏 풀어놓고 방어는 못하도록 꽁꽁 묶어놓은 것도 모자라 출자총액 제한, 금산 분리라는 족쇄까지 채워놓았다.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런 구조에서 세계적인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은 KT&G에 워렌 지 리크텐스타인이라는 이사 한명을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다. 바로 이 ‘트로이의 목마’는 얼마 전 미국 유나이티드 인더스트리얼에 이사로 혼자 상륙한 후 회사 경영정보를 낱낱이 수집하고 내부 기밀을 캐내 단기간에 이사회 의장 자리까지 꿰찬 유명한 인물이다.
최근 고유가 덕분에 현금이 많아진 산유국 자금이 국제 투기자금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투기자본의 M&A가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전 세계 M&A 시장이 연간 40%의 신장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가 지난해에 115% 증가세를 기록했다는 것은 국제 투기자금의 집중공격 타깃이 됐다는 뜻이다.
세계적인 기업사냥꾼들이 속속 한국에 상륙하고 있고 일부는 이미 전초기지를 구축했는데도, 외국 사냥꾼들에게는 무제한 공격권을 주고 우리 기업의 손발은 꽁꽁 묶어둔 현재의 M&A 규제가 훌륭하다는 부총리의 강변은 이 전 총리가 훌륭하다는 것만큼이나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