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영웅들

시대는 영웅을 낳고 영웅은 시대를 이끈다. 역사는 왕후장상이나 영웅호걸이 아니라 백성의 힘으로 이어져왔다는 민중사관도 있지만 영광을 씨줄삼고 오욕을 날줄삼아 교직해온 우리 민족사 또한 걸출한 인걸들의 위대했던 한 삶의 연속이나 마찬가지였다. 민족사를 보든 세계사를 보든 역사의 고비마다 영웅호걸이 몸을 일으켜 역사의 물길을 바꾼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니 비상한 시기에 비상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내우든 외환이든 시대가 난세일수록 태평성대에 비해 훨씬 많은 인걸이 역사의 무대를 가로질러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를테면 고대의 건국사만 해도 그랬다. 고조선 붕괴 후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몸을 일으켜 북부여를 세웠고 추모성왕(고주몽)이 졸본부여로 망명해 고구려를 세웠으며 여걸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이끌고 백제를 건국했다. 또한 남쪽에서는 박혁거세가 여섯 골짜기에 흩어져 살던 조선의 유민을 통합해 신라를 세웠고 김수로왕이 9간이 다스리던 아홉 고을나라를 복속시켜 가락국을 세웠다. 뿐만 아니다. 나라가 어지러운 신라 말기에 견훤과 궁예가 남북에서 각각 일어나 백제와 신라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결국 왕건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나서서 삼한을 재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했으니 이야말로 시대가 영웅을 낳고 영웅이 시대를 이끈 명확한 증거라 하겠다. 우리 5천년 역사를 모두 되짚어볼 수는 없고 이번에는 조선시대의 경우를 돌아보자. 선조 25년(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략에 이어 우리 겨레가 또다시 당한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멍청한 임금과 대신들의 무비유환(無備有患)이 불러일으킨 인재(人災)였지 천재지변은 아니었다. 우지간 이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참혹한 난세를 전후해 가장 많은 문무인재가 나타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시대에 몸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하고 겨레의 살길을 열어준 영웅호걸, 학문과 예술에서 빛나는 자취를 남긴 학자와 문장재사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얼른 떠오르는 이름만 들더라도 겨레의 구세주인 이순신이 가장 앞선다. 이어서 숱한 이름이 생각나니 곧 화담 서경덕, 허응 보우대사, 퇴계 이황, 신사임당,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율곡 이이, 송강 정철, 청허당 서산대사, 사명당 송운대사, 진묵대사, 중봉 조헌, 서애 유성룡, 권율, 교산 허균, 망우당 곽재우, 김덕령 등이다. 그리고 광해군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그는 왕권안보에 혈안이 됐던 부왕 선조에 의해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왕위를 이었고 중국의 명ㆍ청 교체기에 탁월한 외교능력으로 국가안보ㆍ국태민안을 위해 최선의 길을 찾았던 조선조 최고의 명민한 군주였으나 당쟁의 희생자가 돼 결국 왕위에서 쫓겨난 채 연산군과 더불어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경우는 좀 다르지만 명종 때의 의적 임꺽정도 있다. 그는 선배인 연산군 때의 홍길동, 후배인 숙종 때의 장길산과 더불어 3대 의적으로 꼽히면서 국왕과 대신 등 통치세력으로부터는 극악무도한 도둑의 괴수로 지목당했지만 일반 백성으로부터는 민중의 영웅으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뒤 순조에서 철종에 이르기까지 64년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웠을 때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홍경래, 김삿갓, 고산자 김정호, 흥선대원군, 동리 신재효 같은 빼어난 인재가 나온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 어쨌든 이처럼 난세마다 영웅호걸이 나타나 국난극복에 앞장서고 민족사를 빛냈다는 역사적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운 천손족(天孫族)의 나라요 우리 겨레가 조상신과 천지신명의 보우를 받았다는 증명에 다름 아니다. 시대는 또다시 난세를 맞았다. 정치ㆍ경제 모두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고 사회적 병폐도 깊어가고 있다. 존경스러운 사회적 스승도 정치적 지도자도 없다. 곡학아세하는 자는 부지기수로 횡행해도 정권의 부도덕성과 부당함을 비판하는 자는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찾아다녀도 보기 힘들다. 어른들이 할말을 제대로 못하고 제 몫을 못하니 어린 세대가 어찌 바르게 제대로 자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겉모양이나 뜯어고치는 반면 속은 갈수록 곪고 썩어가는 것이다. 나라의 앞날이 기로에 놓였다. 저 앞에 분기점이 있다. 지속적인 발전과 성장의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퇴락과 나락의 길로 갈 것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제 또다시 난국ㆍ난세를 맞은 이 나라에 어떤 영웅호걸이 몸을 일으켜 나라의 명운(命運)을 밝은 쪽으로 힘차게 이끌어갈 것인가. 과연 그런 인걸을 기대해도 좋을까. /황원갑<소설가· 한국풍류사연구회장> 기자 document.write(ad_script1); ▲Top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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