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가 해야 할 일은 막중하다. 독과점의 횡포를 막고 독과점으로 연결되는 기업결합을 제한하며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고 각종 불공정거래행위를 금지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시장경제가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니라 공정한 규칙이 통하는 경기장이 되도록 심판 노릇을 한다. 그래서 경기에 진 사람도 흔연히 승복하고 다음을 기약하게 만든다.재벌이 계열사들끼리 서로 출자하고 빚보증을 해주며 부당 내부거래를 자행하는 등의 반칙을 서슴지 않는다면 시장경제는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중소기업이 설땅을 잃고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이것이 환란 이전 우리 기업 부문의 모습이 아니던가. 이런 반칙을 단속하는 장치를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갖추어놓았다. 그런데도 공정위가 공정한 심판 노릇을 하지 못했다. 물론 공정위가 스스로 직무를 유기한 것이 아니다. 역대 대통령이 시장질서를 제대로 세우는 이런 시책들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도록 공정위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정경유착과 경기회복의 지렛대로 생각하여 자의적으로 운영한 데 문제가 있다.
공정위의 직무유기 사례는 현정부에서도 나타났다. 재벌개혁의 본질적인 시책과는 무관하며 신관치경제의 표본으로 꼽힐 빅딜을 대통령이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다. 공정위가 독과점 심화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직무유기이다. 공정위라는 제도가 본연의 역할을 못하고 인치(人治)가 압도하는 이런 불행한 일은 더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상호출자와 빚보증을 시간표대로 줄여나가고 공정위가 재벌들의 부당내부거래를 수시로 적발·공표하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금감위는 금융개혁과 재벌개혁의 선봉장이다. 금융기관과 기업의 새 지배구조를 짜고 금융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건전성 감독을 강화하며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시키는 일 등을 관장하고 있다. 발족한 지 1년여밖에 안되는데 굵직굵직한 일들을 해냈다. 특히 재벌들이 자산재평가를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고 꽁수를 쓸 때 재경부는 손을 들어주었지만 금감위가 제동을 걸었다. 늑장조사의 의혹이 있는 대로 현대그룹이 주가를 조작한 것을 확인, 검찰에 고발했다. 이는 종전의 금융감독당국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크게 찬사받을 일이다.
재경부는 세계은행의 주문을 거스를 수 없어 금융기관의 인·허가권을 금감위에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예산·회계·의사관리 등의 일만 맡아온 금감위 안의 행정실을 키우려 하고 있다. 금감위를 분가한 형제로 생각하는 재경부가 자기 사람들을 심는 또다른 통로로 활용하려는 심산이다. 그러나 행정실의 확대개편은 관치금융의 부활로 연결되는 옥상옥이다. 공정위에 사무처가 있듯이 금감위에는 금융감독원이 있다. 금융감독과 관련된 일체의 업무는 금감원이 하는 것으로 족하다. 금감위는 재경부가 사주하는 잔꾀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금감위도 정치권의 월권으로 직무를 유기한 사례가 있다. 투신상품의 원리금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가 한남투신의 사례에서 뒤집은 것이 그것이다. 이는 정치논리가 제도를 짓밟은 것으로서 정책의 신뢰성에 결정적인 흠을 내는 악수(惡手)였다.
공정위와 금감위는 재벌·금융개혁의 좌청룡 우백호이다. 대통령은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잘 뽑고 이들이 자기와 같이 임기 중에 일관성있게 본연의 업무를 수행해나가도록 힘을 실어주면 된다. 이렇게 제도가 해야 할 일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기 때문에 과거 정권과 똑같은 인치요, 정치논리가 횡행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YS의 말은 백번 옳다. YS는 말과 달리 내멋대로의 이벤트성 인사와 오만으로 대세를 그르쳤다. DJ도 이번에 너무 일찍 YS의 전철을 밟음으로써 국민을 실망시켰다. 인치를 자제하고 제도를 활용하는 정치가 민주주의에 걸맞는 큰 정치이다.
安國臣 (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