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이민 100주년] 꿈·시련·성취의 발자취

지금부터 정확히 100년전인 1903년 1월 13일 제물포항을 떠난 게일릭호가 하와이에 입항했고, 그 배에서 가난에 찌들린 조선인 102명이 내렸다. 촛불처럼 사그러드는 나라의 운명을 뒤로 한 채 이들은 미국에서의 첫 인생을 시작했고, 한국인으로 공식적인 미국 이민의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2년동안 7,000여명의 한국인이 65척의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들이 하루 10시간동안 받은 임금은 65센트, 월 16달러였다. 돌아갈 나라가 없어진 이들은 중노동을 벗어나고자 캘리포니아로 이주, 식당종업원, 청소부, 가정부, 정원사 등 허드렛일을 닥치는대로,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이민 7년째인 1910년 한인들의 손으로 최초의 주식회사가 설립됐다. LA 인근 리버사이드 카운티에 모여살던 한국인들은 자본금 3,000 달러를 유치해 `흥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한미무역, 한인농상등의 소기업들이 속속 생겨나 쌀 재배와 농산물 교역을 기업화해 나갔다. 이민 20년째가 되는 1920년 대엔 한인 사이에 백만장자가 탄생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야채와 과일을 재배하고 유통하는 회사를 운영했던 김호, 김형순 형제는 `넥타린`이라는 과일을 자체 개발, 1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이들의 성공은 오늘날 LA는 물론 미주 전역에 한인들이 청과물 시장을 장악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송종익씨등이 설립한 `남가주 농산조합`도 채소와 과일의 주간도매상으로 LA 다운타운을 주름잡았다. 당시 한인 기업들은 회사 이익을 내면서도 고국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데 힘을 쏟았다. 흥사단이 세웠던 북미실업과 대동실업, 동지회가 세운 동지식산회사등은 설립 목적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1930년대 미국이 대공황의 늪에 허우적거릴 때도 초기 이민개척자들은 아낌없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미국에 본격적인 한인 이민이 유입된 것은 1965년 연방의회가 이민법을 개정하면서부터였다. LA와 뉴욕등지에 코리아타운이 이때부터 형성되고, 한인 경제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청과상에 이어 봉제ㆍ의류업체가 잇달아 설립됐다. 가발업은 농업과 청과상, 허드렛일 위주였던 한인 경제를 제조업으로 한차원 끌어올렸다. `인모(人毛)`를 들여와 표백작업을 통해 빨강머리와 노랑머리를 만들고, 인조가발도 등장시켰다. 이용, 조규창 등이 당시 가발업계를 선도했다. 70년대 이후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한인 업체수도 크게 늘기 시작했다. 1972년 미 상무부가 발표한 미 전역의 한인업체수는 1,201개에 총매출 6,438만 달러였으나, 5년뒤에는 업체수로는 8,504개로, 그로부터 10년후인 1987년엔 6만8,304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업종별로는 1987년 기준으로 소매업이 절반가까이 차지하고(44.3%), 서비스업(38.6%), 금융ㆍ보험ㆍ부동산업(2.8%) 순이다. 초창기 이민자의 산파역이었던 농업은 비인기업종으로 밀려났다. 92년의 4ㆍ29 폭동은 미주 한인 사회에 큰 이정표를 마련했다. 고도성장을 하는 한인 커뮤니티에 타민족의 강한 견제가 들어오고 있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개척해야 하는 절박감이 다가왔다. 그들이 새로 개척한 자리는 주류사회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민 1세들은 고생했지만, 미국에서 공부한 2세들은 벤처기업, 변호사, 공인회계사, 금융업, 부동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세들의 자본력과 2세들의 두뇌가 결합하면서 한인 커뮤니티에는 스타 기업인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벤처 회사 자일랜의 창업자 스티브 김(한국명 김윤종)은 차고에서 파이버먹스라는 전자부품 공장을 설립, 연간 1억 달러 매출의 초고속 성장기업을 일궈냈다. 암벡스 그룹의 대표 이종문씨, 특수 코팅 페인트 제조업체인 듀라코트의 대표 홍명기씨, 패코철강의 백영중씨등은 벤처 신화와 함께 한인 영웅시대를 열었다. 강종욱ㆍ종호 형재가 설립한 신소재 개발업체 `리퀴드 메탈 테크놀로지(LMT)`는 지난해 나스닥에 상장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금융업계도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외환은행이 74년에 LA에 터를 잡은후 80년대에 윌셔 은행, 나라은행, 새한은행이 문을 열었고, 90년대 이후 가주 조흥은행, 유니티은행, 미래은행이 문을 열면서 한인 은행수가 1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정치에 뛰어든 한인들도 늘고 있다. LA 인근 다이어몬드시에서 시장을 지냈던 김창준씨는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고, 웬디 그램 여사는 지난 88년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장관급인 연방 선물교역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지난 96년엔 남편 필 그램 상원의원의 대통령 출마를 돕기도 했다. 이제 미주지역에 한인 경제권은 200만명의 동포를 하나로 묶고 있다. 미국에서 유태계 인구가 600만명으로 소수이지만, 미국 주류사회 상층부에 진입했듯이, 한국 이민사회는 앞으로 100년이 더 지나면 미국 사회의 주류로 활동할 것이 기대되고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뉴욕 월가에 이르기까지 미주 이민 100주년은 땀과 피와 고통의 기간을 지나 개척정신의 열매를 따는 시대로 가는 분수령이 될 듯하다. <뉴욕=김인영특파원 ink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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