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소송제 도입으로 "자칫 재산 손실" 걱정
“하고 많은 직업 중 왜 하필 이 길로 들어섰는지 정말 후회막급입니다.”
국내 굴지의 유명 회계법인에서 15년 가까이 일해온 디렉터 급 공인회계사(CPA) 김모(39)씨의 하소연이다.
분식회계에 대한 사회적 지탄과 과도한 업무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하나 둘씩 직장을 떠나는 후배와 동료들을 보면서 김씨의 회한은 깊어만 간다.
● 떠나는 공인회계사들
의사나 변호사 못지않게 한때 잘 나가는 전문직의 대명사로 꼽혔던 CPA. `시험 합격=성공 보장`의 부러움을 샀던 이들의 얼굴에 요즘 수심이 가득하다.
SK글로벌 등 대형 분식회계 사태 이후 회계법인에 대한 처벌강화를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집단소송제 도입 등으로 신분 불안은 물론 재산상의 위기감마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회계사들은 만나는 이마다 이구동성으로“국내에 CPA 자격증이 생긴 이래 최대의 시련기”라며 불안감을 호소한다.
실력 있는 회계사들이 고액 연봉을 마다하고 대형 회계법인을 떠나는 것도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최근 실시한 3년 이상 경력직 CPA 공개채용에는 10명 모집에 삼일, 영화, 안건 등 유명 회계법인에서 177명의 지원자가 몰려 18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10명 모집에 55명이 지원했던 지난해 공개채용 때에 비해 경쟁률이 무려 3~4배나 높아진 것이다.
파트너(출자임원)-디렉터(집행임원)-매니저-시니어-주니어로 이어지는 회계법인의 서열체계에서 10년 미만의 매니저나 시니어들이 받는 연봉은 통상 7,000만원에서 1억원 선.
금감원으로 옮길 경우 3,000만~5,000만원의 연봉삭감을 감수해야 하는데도 미련 없이 회계법인에 사표를 쓰겠다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부분의 지원자가 회계법인 근무보다 심적 부담이 적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며, 정년까지 신분이 보장된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한국공인회계사회에 따르면 6월말 현재 국내의 CPA 자격증 소지자는 6,448명. 이 가운데 외부감사와 회계컨설팅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회계사(회계법인 소속 및 개업 회계사)는 4,845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1,600여명은 일반인들처럼 기업체나 정부기관 등에 취직해 본업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으며, 이런 `휴업 CPA`의 수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 공인회계사들의 딜레마
기업 회계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은데 정작 최전선에서 뛰는 회계사들의 신분보장이나 권익보호에 대한 논의는 단 한마디도 없다는 게 회계사들의 불만이다.
회계사들은 기본적으로 돈을 지불하는 주체(기업)의 나쁜 점(분식회계)을 추궁하고 캐는, 상당히 모순적인 일을 한다.
역으로 말하면, 기업들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가능한 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형식적인 회계감사를 받으려 하는 게 생리다.
기업이 돈을 적게 주면 외부감사보고서는 부실해질 수밖에 없고, 부실회계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대형회계법인에 근무하는 한 회계사는 “최근에는 공개입찰 방식으로 외부감사인을 선정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회계법인간 출혈입찰 경쟁으로 부실감사의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졌다”며 “한정된 인원과 비용으로 예전보다 몇 배나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부실회계에 대한 책임은 무한대로 지라고 하는데 누군들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감사의 투명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선 외부감사 비용을 기업이 아닌 공공부담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공인회계사회 관계자는 “외부감사보고서는 기업은 물론 정부와 투자자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공공재`의 성격이 강하다”며 “회계사들이 한눈을 팔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외부감사를 사회적 비용으로 처리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변형섭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