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11일 전남 장흥 이회진에서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와 제작발표회를 갖고 본격적인 촬영에 나섰다. 왼쪽부터 정일성 촬영감독, 김종원 영화제작사 KINO2 대표, 임권택 감독, 송화 역 오정해, 동호 역 조재현, 앵금 역 신지수. /장흥=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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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장흥 '천년학' 세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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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권택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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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전남 장흥군 회진면 선자마을. 야트막한 세 봉우리가 넉넉히 병풍 노릇을 하며 그 앞으로 그리 넓지 않은 들과 억새밭,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제법 한가로운 어촌 마을 풍경을 장식한다. 억새밭과 바다 사이로는 벌겋게 녹슨 함석지붕의 주막 한 채가 덩그러이 놓여 있다.
이 곳에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성공 기원 고사와 함께 첫 촬영에 들어갔다. 이젠 무뎌질 법도 하건만, 새 작품에 들어가는 임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의 얼굴에선 긴장감이 배어났다. 김덕수 풍물패의 사물놀이에 맞춰 카메라와 돼지머리를 앞에 두고 절을 올리는, 어느덧 일흔을 넘긴 두 거장의 뒷모습에선 예술을 향한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100번째 영화라는 영광에 앞서 지난 1년여간 투자사를 못 구해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던 임 감독은 “전화위복”이라는 말로 첫 촬영에 임하는 소감을 밝혔다.
“애초 영화를 구상할 때보다 훨씬 발전된 모습으로 촬영에 들어가게 돼 다행이에요. 좋은 영화가 그리 쉽게 찍히겠어요? 영화 100편 해 오면서 이번만큼 많은 성원을 받은 건 처음입니다.”
임권택 감독의 신작 ‘천년학’은 93년 ‘서편제’의 속편 격으로 이청준의 단편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다. ‘서편제’에서 아버지 유봉을 버리고 떠났던 동호가 세월이 흘러 선학동을 다시 찾아 눈 먼 송화를 찾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 송화 역엔 ‘서편제’의 오정해가, 남자 주인공 동호 역은 조재현이 맡았다.
임 감독은 주연으로 낙점한 조재현에 대해 “오래 전부터 탐냈던 배우였는데 이 영화로 만날 줄은 몰랐다”며 “연이 맞아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제작 초기 스타배우가 없다는 이유로 투자 거절을 당했던 임 감독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캐스팅이다. 조재현은 “감독님의 영화에 출연하는 자체만으로 영광”이라고 겸손해했다.
‘천년학’의 기둥은 역시 동호와 송화의 사랑. 임 감독은 남녀간의 사랑을 영화의 전면에 내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새삼스레 사랑 이야기를 다루게 된 연유를 묻자 상상도 못했던 답이 나왔다. “이젠 나도 사랑을 알 만한 나이도 됐고 해서…”
판소리가 주요 소재이지만, ‘서편제’나 ‘춘향전’ ‘취화선’ 등과는 달리 이번 영화에선 판소리가 그리 많이 다뤄지진 않을 예정이다. 우리 전통의 소리를 일반 관객들에게 쉽게 알리는 건 ‘서편제’로 이뤘다는 게 임 감독의 자평이다. 음악가 양방언의 곡으로 판소리와 함께 현대적 소리도 영화의 주된 배경음악으로 쓸 계획이다.
사랑보다도, 판소리보다도, 100번째 작품을 연출하는 임 감독의 과제는 과연 전작들과 어떻게 다르게 보이느냐에 있다. “스스로 숙제를 던진 거에요. 영화를 찍을 때마다 늘 그래왔어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의심해 왔죠. 스태프나 연기자들이 이런 내 마음을 알았다면 참 많이 불안해 했을 거야.”
고사가 끝나고 스태프들은 첫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동호(조재현)가 20년만에 선학동에 돌아와 주막을 찾는 장면이다. 제법 바람이 쌀쌀한 가운데 정일성 촬영감독이 예의 익숙한 솜씨로 파인더에 눈을 고정시킨다.
“액션!” 정 감독이 우렁차게 슛을 날리자 동호가 천천히 언덕을 올라간다. 화면 속엔 흙길과 소나무 두 그루, 덩그러니 놓인 주막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빚어냈다. NG 한번 없이 첫번째 컷이 완성됐다. OK 사인이 떨어지자 임 감독 이하 스태프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크랭크인을 자축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천년학’은 올 연말까지 장흥과 광양 등지에서 사계절 풍경을 모두 담아내며, 후반작업을 거쳐 내년 5월 개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