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겨울연가'를 3일간 잠도 안 자고 봤어요. 다음 편은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에. 남한 드라마는 다음 편을 기다리게 하는 마력이 있더라고요." 2007년 초 탈북해 그 해 12월 국내로 들어온 A(40)씨. 양강도(량강도) 삼수군에 살았던 그는 CD로 본 '겨울연가'를 또렷하게 떠올리며, 주인공역을 맡은 최지우와 배용준은 가장 좋아하는 남한 배우라고 했다. A씨는 함경북도 김책시의 언니 집, 함경남도 함흥의 친구 집 등 북한 여러 곳에서 남한 드라마를 봤다고 했다. 북한 주민 상당수가 북한 전역에서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를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건 물론이고 돈만 있으면 시장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남한의 최신 작품을 사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고위층은 인기 작품을 브로커에게 주문해 밀수까지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강동완 통일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최근 열린 현대북한연구회 창립1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영상매체의 유통경로와 북한주민의 의식변화'라는 논문에서 이 같은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2000년 이후 북한을 탈출한 33명의 북한이탈주민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전원이 한 번 이상은 일반TV나 CD, DVD플레이어를 통해 한국의 영상물을 접했다고 답했다. 이들 중 인민보안성, 중앙은행 지배인 등 고관 출신인 14% 가량은 매일 남한 방송을 봤다고 했다. 최신 드라마는 편당 쌀 100㎏ 가격 북한 주민이 남한의 방송과 영화를 보는 경로는 두 가지였다. 북한 정부가 채널을 고정해 놓은 TV외에 남한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TV를 따로 사는 경우다. 지난해 말 한국에 들어온 김모(35)씨는 "(강원도 고성에는 24시간 남한 방송이 수신됐고, (황해북도) 사리원에서도 새벽에 방송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다수는 시장에서 CD와 DVD를 구입해 영상물을 접했다. CD는 장당 1,000~3,000원선(2007~2008년 기준), 쌀 1㎏ 가격(1,000~1,500원)과 맞먹는 수준이다. 일부 북한이탈주민은 "최근 드라마는 한 편(보통 CD 10장 분량)에 10만원까지 하고, 웃돈으로 100원을 얹어줘야 구할 수 있다"고 전했다. 남한산 CD플레이어도 10만원 안팎으로 시장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영상물의 유통은 고위 간부 등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모(29)씨는 고위 간부 부인의 주문으로 CD 등을 직접 밀수해 시장에서 팔아왔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들이 남한 방송을 보고는 인기 드라마나 영화 제목을 지정해 구입을 지시하면 하룻밤에 수천 개의 CD가 국경을 넘어오기도 한다"고 했다. 운반 과정에서 군경에 대한 뇌물 제공도 필수다. 이씨는 "명절 때는 특별히 고급양주 등을 상납하는 일종의 '뒷배경 관리'까지 있을 정도로 남한 드라마 인기가 높다"며 "통상 밀수 때마다 2,000원 정도가 뇌물로 쓰인다"고 설명했다. '가을동화' '천국의 계단' 등 인기 최고의 남한 드라마로는 '가을동화'(13명)와 '천국의 계단'(11명)이 꼽혔다. '겨울연가' '아이리스' 등 드라마는 물론이고 '미녀는 괴로워' '화려한 휴가' '어린 신부' 등의 영화, '해피선데이' 같은 연예오락프로그램, '인간극장' 등 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종류의 영상이 유통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억나는 인기배우는 최지우와 배용준(겨울연가), 이병헌, 김태희 등이 거론됐다. 가수 이효리를 꼽은 이도 있었다. 강 연구원은 "아직까지는 당국의 통제로 인해 일반 주민보다는 고위층이 주로 시청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젊은이들이 남한 드라마 주인공의 말투나 헤어스타일을 따라 할 정도로 남한 방송물의 유통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