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민주주의'가 역풍을 맞고 있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유일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더 이상 발전된 체제는 없다는 의미로 '역사의 종말'이라고 규정했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장담과 달리 현재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및 독재정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과 정치혐오증 등으로 위상이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견제와 균형' 원리 도입, 직접민주주의 원칙 강화 등 제도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역행하는 민주주의=지난 20세기 중반 이후 민주주의 체제는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유럽의 파시즘 청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폐지, 그리스·스페인·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등의 독재주의 정권 타도 등이 대표적 예다. 이 같은 성과를 기반으로 지구촌은 자신들의 운영체제로 민주주의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미국 인권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1941년 11곳에 불과했던 민주주의 국가는 2000년 120곳으로 전 세계 국가의 63%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전진은 21세기 들어 제동이 걸렸다. 프리덤하우스가 매년 발표하는 전 세계 자유(global freedom)평가지수는 지난해까지 8년 연속 후퇴했다. 특히 올 들어 민주주의의 후퇴 사례가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서구권과 러시아 간 대립의 장이 되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이다. 2004년 이른바 '오렌지 혁명'을 통해 부패정권을 청산한 이 나라는 지난해 11월 이후 친서구·친러시아 세력 간 갈등이 극심해지면서 최근 사실상의 내전상태에 들어갔다. 최근 민주적 투표절차를 거쳐 재벌 출신의 페트로 포로셴코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오히려 21세기 차르(황제)로 불리는 '권위주의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태국도 올 들어 발생한 민주주의 후퇴의 대표적 케이스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 19번째 군 쿠데타가 발생해 군부정권이 또다시 권력을 잡았다. 특히 쿠데타로 국가를 접수한 태국군은 "민주주의가 국가에 큰 손실을 끼쳤다"며 권력찬탈의 정당성을 공공연하게 선언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2010년 중동의 민주화 바람을 몰고 왔던 '아랍의 봄'도 처참히 실패하고 있다. 아랍의 봄으로 독재자였던 호스니 무바라크를 축출한 이집트에서는 또 다른 권위주의자이자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무함마드 무르시가 등장했다. 이후 무르시의 '1년 천하'는 군 쿠데타를 불러왔고 최근 대선에서 이 쿠데타의 선봉장이었던 압둘팟타흐 시시 전 국방장관이 새로운 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시리아에서는 내전 책임자인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최근 온갖 불법이 판친 선거를 통해 3선 연임에 성공했고 리비아와 예멘 등도 내전 직전에 몰리는 등 정정불안이 극심하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980~2000년의 민주주의 후퇴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이후에는 급격히 잦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유럽도 홍역=이 같은 민주주의 후퇴는 신흥국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선봉장이자 최후의 보루임을 자처했던 미국과 유럽(EU)의 역사퇴행은 '왜 작금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는가'라는 물음에 근본적인 답을 준다. 전문가들은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계기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및 이어진 유럽발(發) 재정위기에서 "민주주의가 매력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했다. 선진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미국·EU조차 눈앞에 닥친 경제위기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이 전 세계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스타인 린젠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지난해 낸 자신의 저서 '네이션 오브 데블스(Nation of Devils)'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횃불이 돼야 하는 이들(선진국)이 오히려 불충분한 거버넌스를 갖춘 국가로 후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지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정치교착(gridlock)'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매년 예산안 등 주요 이슈를 놓고 민주·공화 간 당파싸움이 거듭되더니 지난해에는 사상 초유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까지 불거졌다. 여기에 금융위기의 주역인 대형은행(IB)들을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논리로 국민 세금을 투입해 구제해놓고 이후 벌어진 금융권의 보너스 잔치에 정부가 별 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이 미국의 정치 시스템과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됐다고 이코노미스트지는 전했다.
EU도 마찬가지다. 2011년 피그스(포르투갈·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 국가의 재정위기와 관련해 단일통화 체제인 EU는 단일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EU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독일은 엄격한 재정긴축을 주장했던 반면 피그스 국가들은 이 같은 정책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먹고 사는 문제에 EU 체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에 반(反)EU 정서가 극대화됐고 이는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 반EU를 기치로 내건 극우정당의 돌풍으로 이어졌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유럽이 국가 롤모델로서의 매력을 잃고 있다"며 "정부 예산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미국 정부를 이상향으로 인식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최근 신흥국들의 생각"이라고 진단했다.
◇창궐하는 민주주의 병= 포퓰리즘과 정치혐오증 등 이른바 '민주주의 병(democratic distemper)'도 두드러지고 있다. 표를 얻어야 하는 민주권력은 국민들의 단기적 요구에만 집중하는 포퓰리즘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재정지출 남발은 훗날 국가의 발목을 잡는 '빚더미 민주주의(debt-financed democracy)'로 연결된다. 실제 유럽의 문제아로 떠오른 프랑스·이탈리아는 지난 30년 이상 균형예산을 달성하지 못해왔다.
정치외면 현상도 극심하다. 1950년대 20%에 달했던 영국인들의 정당 가입률은 현재 1%에 불과하다. 49개 민주주의 국가를 대상으로 진행된 한 대학 연구에서는 2007~2013년의 전 세계 주요 선거 투표율이 1980~1984년 당시에 비해 10%포인트 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냉혹한 정치환경에서는 고통을 인내해달라는 정치권의 부탁 대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포퓰리즘이 득세할 여지가 더 넓어진다. 한쪽에서는 정치를 경멸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정부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는 이율배반적 현상을 주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흥국 민주혁명 안착에 더 노력해야=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데이비드 런시먼 정치학과 교수는 지난해 말 낸 저서 '더 컨피던스 트랩(The Confidence Trap)'에서 "민주주의는 자기만족의 경향이 높고 위기에 직면해서는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 있는(muddle through)' 능력을 갖췄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는 내구성이 강해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민주주의 후퇴 사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퇴행은 가속화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미국의 시사 격주간지 '더 뉴리퍼블릭'은 아랍의 봄 사례 등 민주주의 역행과 관련한 최근 칼럼에서 "혁명 이후의 작업은 혁명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며 "혁명이 끝나면 광장에 모인 군중의 응축된 감정이 합법적인 제도로 빠르고 즉각적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의 부작용과 역기능을 방지하려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열망보다 이를 뒷받침할 제도 도입 및 보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민주주의의 설계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은 선거 그 자체보다 여기서 당선된 권력을 감시할 '견제와 균형' 강화가 더 필수적이라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보다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언론은 민주제도 재정비 및 보완의 모범사례로 △스웨덴식 일몰조항(10년마다 한 번씩 법률을 재정비하는 방안)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오픈 프라이머리(국민참여형 예비경선)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토크빌이 주창한 타운홀미팅(지역주민회의) △핀란드의 초당파적 시민기구 등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