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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제대로 사용해 21세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는데 길라잡이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백남준이 자신의 작품과 논문들을 통해 하고자 했던 일일 테니까요."
지난 2일 경기도 용인시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만난 박만우(53ㆍ사진) 관장은 창조경제를 창출하려는 융복합의 시대에 '백남준'이라는 자산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박 관장을 비롯한 백남준아트센터 직원들은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는 8월 9일부터 9월 1일까지 열리는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이하 EIF)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작품들을 공식 선보이기 위해 준비작업 때문이다. 박 관장은 "올해는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열렸던 백남준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50주년을 맞는 해인 만큼 에든버러에서 전시를 갖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소개했다.
1세대 독립 큐레이터 출신으로 서울대와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했던 박 관장은 지난 2011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으로 취임한 후 백남준아트센터의 대중 인지도 제고에 힘을 쏟아왔다. 그가 미술, 더 나아가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과 인연을 맺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과의 만남, 그리고 큐레이터로 살다= 1970년대 후반 웬만큼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면 법대나 경영대를 선택했을 법 했지만 박 관장은 일찌감치 미학 전공을 결심했다고 한다. "서울대에 다니던 형이 연극 동아리를 했고, 이화여대 다니던 누나는 마당극 서클에서 활동 했어요. 중고등학교 때 자연스럽게 대학 캠퍼스를 들락거리면서 다양한 문예 활동을 목격한 셈이지요. 서울대 인문대 철학과에서 미학을 전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고1때 미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대학원을 마친 그는 방송국에서 구성작가나 PD로 일하는 동기들처럼 KBS에 들어갔다. EBS 전신인 교육제작국에서 전통문화강좌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기획과 편집, 프로듀싱 등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때부터 미디어 아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진화된 영상 매체를 접할 기회를 얻게 된 데다 프로듀싱 작업을 도우면서 배운 기획력이 나중에 큐레이터로서 일할 때도 큰 보탬이 된 것 같습니다."
그는 1년 6개월 정도의 방송국 생활을 접고 돌연 파리행을 결심한다. 자신의 지도 교수였던 임영방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파리 유학 경험을 여러 차례 들려주면서 박 관장에게도 파리행을 권유했던 것. 아울러 박 관장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데다 미학 전공자로서 서양 미술의 본토인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한다.
10여년 동안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미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독립 큐레이터로서 생활하던 박 관장은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으로 고국 땅을 밟게 된다.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그런 관심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파리로 떠난 셈이었지요. 광주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역사적 배경이나 유구한 문화 유산 등에 매력을 느낀 데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동시대인으로서 부채 의식도 어느 정도는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으로 일한 2년여 동안 그는 비엔날레 본연의 전시 업무뿐 아니라 지역의 문화 NGO(비정부기구)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1세대 큐레이터로 뿌리를 내린다.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부산비엔날레 측에서 그에게 전시 기획을 맡긴 것. 그는 2004년과 2006년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에 참여하면서 자신만의 색채를 담은 전시를 선보이게 된다. 2004년 최태만 국민대 교수가 전시감독을, 박 관장이 기획을 각각 맡아 '틈-N.E.T'이라는 주제아래 37개국, 90여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 살고 있는 많은 유색 인종들의 근원을 따져보면 그들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서양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제3세계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나 인도, 파키스탄 등지의 작가들을 섭외하는 한편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식민지 출신 이방인 작가들에 주목했어요."
이렇듯 실험적인 도전 정신과 독창적인 기획력이 빚어낸 2004부산비엔날레는 뜨거운 호평을 받았고 그는 2006부산비엔날레에 단독 커미셔너로 초빙된다. '두도시 이야기: 부산-서울/서울-부산'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부산이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과도한 경제성장, 그리고 압축 성장에 따라 파생되는 문제점, 도시의 이원화 등을 미술로 짚어주고 싶었어요. 제2의 도시가 제1의 도시인 서울의 병리적 현상을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전시 제목도 찰스 디킨스 소설의 제목을 따서 '두 도시 이야기'로 정한 거예요. 특히 부산 내에서의 이원화 현상은 심각해서 서울의 강남, 강북처럼 해운대 지구와 비해운대 지구로 나뉘어 구도심의 공동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었거든요."
◇백남준과의 우연한, 하지만 필연적인 인연= 2011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으로 취임했지만, 박 관장이 백남준 선생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을 되돌아 보면 우연한 만남이 나중에 필연이 되는 법이다. 그가 KBS에서 일하고 있을 때 '굿모닝 미스터 오웰' 프로젝트를 위해 방송국을 찾은 백남준과 복도에 마주쳤던 것이다.
"조지 오웰은 자신의 소설 '1984'에서 미래 사회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빅 브라더의 손에 장악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했어요. 하지만 백 선생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전무후무한 위성아트를 통해 '당신의 예측과는 달리 우리는 미디어와 함께 살고 있다'고 반박했지요. 아마도 그때 당시 그가 시도했던, 지구를 단일 네트워크로 묶는 인터넷이나 SNS 개념이 아니었나 싶어요. 인터넷으로 전세계가 하나로 연결될 미래를 그가 그때 이미 예견한 것이지요. 창조경제가 큰 화두로 떠오르는 오늘 이 시점에 백남준이 다시금 조명 받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박 관장은 우리나라에 비엔날레가 본격 도입된 데도 백남준 선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1993년 우리나라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휘트니비엔날레가 열렸어요. 당시 미국 밖을 한 번도 나간 일이 없는 휘트니비엔날레의 한국 유치는 뉴욕 미술계에서도 상당한 화제였지요. 15만 명이 참관한 이 행사는 우물 안 개구리 같던 한국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비엔날레'라는 용어가 일반인에게 확장됐고, 광주비엔날레가 생기는 등 한국 미술 발전에 커다란 기폭제가 됐던 셈이지요. 그런데 휘트니비엔날레의 한국 유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백남준 선생이예요. 1992년 세계문화예술공로자에 선정돼 25만달러를 상금으로 받았는데 이 돈을 휘트니 비엔날레 한국 유치에 썼던 거지요. 직접 휘트니미술관에 찾아가 데이비드 로스 관장에서 요청을 해서 성사됐거든요. 당시 휘트니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들은 LA 폭동 등 인종 갈등을 다룬 미디어 아트 작품들이 많아서 고국에 꼭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었지요."
◇백남준, 그리고 창조경제= 2008년 설립된 백남준아트센터는 개관 2년 만에 2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등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지만 다소 난해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2011년 취임한 박 관장은 아트센터의 방향을 '대중친화적인 공간'으로 잡았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측면을 유지하면서도 전시와 관련된 퍼포먼스나 워크숍 등의 프로그램으로 대중친화적인 측면을 강화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고 있다. 바로 대다수 국공립 미술관이 겪고 있는 재정 문제다. 경기도가 세수 부족으로 문화 재정이 축소되면서 2011년에 비해서도 절반 가까이 재정 지원이 줄었다. 이를 타개할 방법은 국고 지원과 기업들의 후원이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다. 박 관장은 아티스트 백남준이 남긴 메시지들이 창조경제를 열어가려는 현재 우리나라에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며 국가 차원에서 백남준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즘 융복합이 뜨거운 화두인데 지난 1964년 백남준은 실제 퍼포먼스까지 가능한 로봇 K-456를 개발해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서 새로운 실험을 완성했고, 비디오 합성기라는 영상제작시스템을 제작하기도 했어요. 그가 단순한 아티스트를 넘어 예술과 문화 전반, 현대 과학기술에 수많은 이론적 통찰력을 가졌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런데 국내에 백남준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전문가조차 없습니다. 백남준이 남긴 작품, 어록, 실험 등을 하나하나 연구해 21세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잡아가는 데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백남준이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을 제대로 쓰는 일일 테니까요."
He is… ▲1959년 서울 ▲1982년 서울대 미학과 ▲1984년 서울대 대학원 미학과 ▲1985~1987년 파리1대학 미학박사 과정 ▲2001~2003년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2003~2004년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 큐레이터 ▲2005~2006년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 전시감독 ▲2008~2009년 지식경제부 주관 독일 하노버 산업박람회 동반국 문화행사 현대미술전 큐레이터 ▲2011년 아뜰리에 에르메스 예술감독 ▲2011년 3월~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
백남준아트센터 기획전 '러닝 머신(Learning Machine)' 작가와 관객 벽 허물고 창의·참여의 예술 보여주다 ■ 플럭서스 작품 70여점 전시 '흐름' '변화'라는 뜻을 가진 플럭서스(fluxus)는 지난 196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발생한 경험적인 예술운동이다. 백남준을 비롯해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조지 브레히트, 오노 요코, 앨리슨 놀스 등 전세계의 다양한 예술가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해프닝ㆍ이벤트ㆍ게임아트ㆍ메일아트 등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며 '경험을 창조하는 예술가'와 '공동의 창조자인 관객'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실험했다. 이들의 실험은 창의성과 자발성을 가진 '창조적 시민'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이런 기획의도를 접목한 여름 특별전 '러닝 머신(Learning Machine)'을 오는 10월6일까지 연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소장한 플럭서스 작품과 그와 관련된 현대작가의 작품 등 총 21팀의 70여점으로 구성됐다. 그 중에서도 백남준이 1964년 독일의 해프닝그룹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는 지금 다시 봐도 경이로울 뿐이다. 유럽 지도를 연상케 하는 작품에는 '출생에 동의한 아기만 태어나게 하는 진보적인 산부인과' '십자군전쟁 때의 정조대를 파는 상점' '반등밖에 모르는 다우존스지수' '백남준이 암살 당할 장소' 등 유머러스하면서도 남다른 예지력이 돋보이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전시회의 제목이 된 '러닝머신'은 마키우나스가 플로 차트 형태로 만들어낸 독특한 작품이다. 전시장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아울러 기발한 발상이 떠다니는 백남준의 '데콜라쥬 바다의 플럭서스 섬'은 한국어로 해석해 전시장 바닥에 확대해놓았다. 작가의 지인들이 적어 보낸 '무언가'를 저울에 올려놓고 관람객들이 자신의 생각을 적어 반대쪽 저울에 올리거나 추를 사용해 균형을 표현하는 마에코 시오미의 '플럭서스 저울'도 참여하는 재미가 독특하다. 또한 작가이자 미술교육가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고(故) 박이소의 진지한 '작업 노트',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國劇)를 만나 배우는 정은영 팀의 '예술가의 배움'도 예술의 교육학을 잘 보여준다. '탁구'라는 운동행위를 기발하게 재구성한 김월식의 '팡펑퐁풍핑'은 어린이들이 무척 좋아할 만한 작품이다. 작가는 넉 대의 엉뚱한 탁구대를 설치하고 기발한 탁구채 14가지를 만들어 탁구를 쳐보게 했다. 야구방망이ㆍ삽ㆍ파리채에 탁구채를 부착해 경기를 하도록 한 작가는 "소통의 낡은 관습을 생각해본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아트센터는 전시와 함께 작품과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 'NJP 크리에이티브 썸머'를 23일부터 8월16일까지 진행한다. 관람료 성인 4,000원, 청소년 2,000원, 도민 50% 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