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스의 연필과 노트 한 권도/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1981년 발표된 가수 이연실의 ‘목로주점’ 가사처럼 백열등은 우리의 오랜 친구다. 소주 한잔을 기울이던 포장마차와 가로등에 매달려 어두운 골목길을 밝혀주던 불빛에 사람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하루의 시름을 달랬다. 지금은 발광다이오드(LED)나 3차원(3D) 조명에 밀려 구닥다리 취급을 받지만 10~20년 전까지만 해도 형광등과 함께 언제나 곁에 있었던 동무였다.
△1879년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과 영국의 조지프 윌슨 스완에 의해 처음 모습을 드러낸 백열전구는 초창기 일본의 대나무를 태워 만든 필라멘트를 사용했다. ‘제2의 불’이라는 극찬을 받았음에도 사용 시간은 1,500시간이 채 안됐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한 인물이 미국의 화학자 어빙 랭뮤어. 그는 1916년 4월 코어 모양의 텅스텐으로 만든 필라멘트를 개발하면서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이후 아르곤 가스가 주입되면서 이론적으론 100년간 쓸 수 있는 빛의 혁명을 완성했고 이 디자인은 지금까지 무려 97년간 그대로 이어져왔다.
△이 땅에서는 1887년 고종에 의해 백열등이 첫선을 보였다. 1898년 민간 보급이 시작됐으니 115년간 밤을 밝힌 작은 햇빛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 말 상대적으로 전기료가 적게 들고 수명이 긴 형광등의 등장으로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둥근 유리구슬은 서민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산업 발전과 수출 드라이브에 지친 몸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1970년대 경제기획원이 공장과 도매가를 통제하면서까지 백열전구 가격 안정에 힘을 기울인 것은 터지기 일보 직전인 민심을 수그러지게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부가 내년부터 백열전구의 생산과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고 밝혔다. 물론 재고로 남은 제품을 볼 수는 있겠지만 얼마나 갈지 모르는 상황. 에너지 효율 향상과 소비자 비용 감소를 위해서라곤 하지만 시대 요구에 밀려 100년 지기를 잃는 안타까움이 솟아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직도 수요가 적지 않은데…. ‘합리성’은 이렇게 우리에게서 또 하나의 벗을 앗아가나 보다. /송영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