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연방정부 채무 추이, 자료 출처: 대외정책경제 연구원>
10월 1일부로 연방정부가 폐쇄에 들어가면서 수 많은 공공기관 근로자들이 일시적으로 해고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 국민들이 느끼는 불편함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필자 역시 연방정부 기관들의 사이트를 자주 찾아 들어가는데, 대부분 사이트들이 제한적인 서비스만 제공하고 있으며 몇몇 사이트들은 아예 문을 닫아버려 여러모로 정보 취득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미국 정부가 문을 닫았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 17차례 문을 닫았던 적이 있었는데, 게 중 대부분은 수일 내로 협상을 하면서 사태가 마무리 되었기에 이번에도 단기적인 이벤트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었다. 그런데 10일째를 넘어간 지금 이 시점에도 양당간의 협상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새이다. 여기에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을 한 차례 더 가중시켜 줄 이벤트가 다가오고 있다.
채무한도 협상이다. 올 초에도 한차례 채무한도 협상을 두고 진통을 앓았었다. 2011년 여름의 경우에는 대외 불확실성이 가중된 측면이 있었지만 한도 협상의 지연으로 인해 미국은 신용등급이 한 단계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덕분에 짧게나마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 주요국 주식시장이 폭락을 하면서 금융위기가 다시 오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투자자들 사이에서 고조됐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미국에만 다른 선진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채무한도가 존재하는 것일까? 무언가 특별한 이점을 제공하는 것이기에 채택하는 것인지 그에 대한 의문점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채무한도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왜 이렇게 미국 경제에 문제가 되는지 그 탄생 배경과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채무한도의 역사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필요할 때마다 국채 발행 조건 및 규모를 지정하여 재무부에 차입권한을 부여했었다. 가령 1904년 파나마 운하 건설할 때처럼, 대체로 특정한 목적 용도로 차입을 하게 될 경우 의회가 조건 및 규모를 지정하고 이를 승인해주었던 것이 한가지 예이다. 승인 절차에 있어서도 채권 발행의 목적에 따라 개별적으로 승인 했었다. 그런데 예산안 편성에 변혁을 일으키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전쟁 중반부까지는 중립을 유지하면서 각종 무기 및 물자들을 양쪽 진영에다가 신나게 팔아왔었지만 후반부에 들어서 미국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미국도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1917년 당시 의회에서는 전쟁 자금 및 관련 각종 재정조달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2차 자유공채법을 제정하여 채무한도를 설정하였고,그 한도 내에서 재무부는 필요할 때 마다 국채를 발행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42년에 공공채무법이 제정되어 재무부는 광범위한 재량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미국은 국채의 종류, 발행 방법, 조건 등에 있어서 별 다른 발행 승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한도 내에서 마음껏 찍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1910년 후반부터 1940년 초반에 일어 났던 일련의 사건들이 오늘날 국가채무한도에 대한 법적인 효시가 된 셈이다. 한동안 ‘채무한도’는 정부 국채 발행에 대한 의회의 재정 통제 기능, 예산 편성 및 집행에 있어서 유연성을 부여하는 등의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 게다가 미국 정부가 진 빚이 그리 많지도 않아 이자지급 부담이 덜했고 그래서 채무한도를 상향조정 시켜도 정부 재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인식이 팽배했다. 그런데 지금 첨부한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부시 및 오바마 정부를 거치면서 미국의 국가채무는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늘어나게 되었다. 상황이 반전된 셈이다. 이제는 이자 비용 부담만해도 연간 수천억 달러에 육박하는 상황에 직면해있으니 이를 가만 놔둘 리가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기존처럼 부채의 상한선을 설정해놓고 그 한도 내에서 국채를 발행하여 적자를 충당하거나 하는 행위는 더 이상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자칫 잘못하여 한도협상에 실패 시, 미국이 디폴트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도 증폭되었고, 이따금씩 금융시장은 이런 우려로 인해 불확실성이 증폭되기도 했었다. 과거에는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필요한 도구였으나 이제는 정치적인 협상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니,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 채무한도 협상은 올 1월에도 세계경제에 가장 부담이 되는 문젯거리였는데, 당시 이코노미스트지에서는 아래와 같은 논평을 했었다. “미국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 채무한도는 골칫덩어리 같은 존재였다. 예를 들자면, 정부는 통상적인 차입을 재개하기 이전에 의회에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바로 이 때 채무한도라는 것이 집권여당뿐 아니라 힘을 잃은 야당들에게도 의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이들과 협상하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채무한도가 적자에 대해서 정치인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정치적인 대가를 증가시켰다면, 이것은 골칫덩이가 아닌 유익한 수단이 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 정치가 갈수록 더욱 양극화 되면서, 채무한도는 이른바 대량의 금융 살상 무기가 되어버렸다. 2011년 여름, 공화당은 공공연히 디폴트의 위험을 무기로 삼아 오바마와 민주당을 적자 삭감 협상테이블로 밀어 부쳤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한 신용등급 회사가 미국의 트리플 A 신용등급을 강등시키도록 촉발시키기도 했다. 최근 ‘재정절벽’을 놓고 한판 붙었던 협상에서 세금 인상안에 굴복하고, 지출 삭감도 어떠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해 분노하고 있는 공화당은 또 다른 싸움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이다 (….) 만약 미국이 법적인 의무를 충족시켜야만 하는지를 놓고 민주당과 공화당간에 또 다른 싸움을 벌이게 된다면 미국 정부는 더 이상 신뢰할 수가 없다는 인상을 강화시킬 것이다. 차라리 부채한도를 지금 폐기하는 것이 낫다. (1월 12일자 이코노미스트)”
앞서 말했듯이, 민주당과 공화당 둘 다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면서 각자가 내놓은 예산안을 대로 협상하지 않으면 전쟁이라도 불사할 기세를 보였다. 당연히 채무한도 증액도 쉽사리 이뤄지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오늘(10일) 반가운 소식이 전해져 왔는데, 내용은 즉 폐쇄 이후 처음으로 오바마대통령을 비롯해 양당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전격회동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미 정치인들이 이런 행보를 보인 주된 이유는 연방정부 폐쇄로 인해 미국 국민들이 불만이 고조되면서 여론이 악화되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어제 갤럽에서 나온 여론조사에서 양당의 지지율은 상당히 하락했었는데, 특히나 공화당의 지지율은 급락하여 면치 못해 지지율이 28%로 나왔으며 이는 1929년에 처음으로 조사를 실시한 이후로 최악의 지지율이었다. 이렇게 악화된 여론은 내년에 있을 중간선거에서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공산이 크다. 실제로 1996년 폐쇄사태 때도 그랬고, 2011년 신용등급 강등 당시에도 정치인들을 향한 유권자들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었다. 이렇듯 서로 오래 끌어봤자 좋을 것 없으니, 한발씩 양보해서 합의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렇게 양당간에 회동을 한들, 예산안 협상에 있어서는 오바마케어로 인해 여전히 진통을 겪을 전망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부채한도를 증액하자는 방안에 대해선 양당 모두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연방정부가 문을 닫은 상태에서 디폴트(채무불이행)까지 발생하면 그 동안 생각 외로 잠잠했던 금융시장은 상당한 리스크에 휩싸이게 될 가능성이 높기에 양 발등에 떨어진 불 중 하나는 황급히 꺼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무한도 증액으로 인해 시장의 불확실성은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이쯤에서 과연 채무한도가 미국 경제에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 수년간 채무한도는 정치적인 싸움을 위한 도구로만 활용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코노미스트지의 말대로 차라리 부채한도는 폐지하는 게 낫지 않을 까. 그리고 지금 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싸움이 아니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 “양적완화축소”를 시장이 호재로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고용시장 회복과 소득증가로 인한 진정한 경기회복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그들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