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전쟁 6개월… 지정학적 영향은] 디폴트 위기 러시아 등 반미진영 직격탄

경제상황 갈수록 나빠지자 공고했던 푸틴 지지율 하락
베네수엘라도 경제 위축… 사회보장 지출 중단 직면
이란은 재정적자 악화… 핵협상에도 불리한 영향


지난 6월부터 반년간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주도한 유가폭락은 '반미 진영'인 러시아·이란·베네수엘라에 직격탄을 날리면서 글로벌 지정학적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6일(현지시간) 6월부터 6개월간 이어진 유가폭락으로 미국과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던 러시아·베네수엘라·이란이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고 분석했다. 북해산브렌트유 기준 국제유가는 6월 배럴당 110달러를 넘어섰지만 26일 현재 배럴당 60달러를 간신히 지키며 6개월 만에 반토막이 났다.

국제유가 폭락의 최대 피해자로는 러시아가 꼽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서방의 경제제재에 유가폭락까지 겹치면서 1998년에 이어 또다시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의 총수출에서 원유·석유제품·천연가스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기준 약 67%이며 관련 수출이 재정수입에서 점하는 부분은 50%에 달한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이에 따라 23일 러시아를 '부정적 관찰 대상(CreditWatch Negative)'에 올리며 향후 90일 내에 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 수준으로 강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제위기는 공고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인기에도 균열을 만들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레바다첸트로가 1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대선후보로서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82%로 전월보다 6%포인트 떨어졌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현지 언론들은 푸틴 대통령이 여전히 국민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하나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지지도 하락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남미의 대표적 반미국가인 베네수엘라도 위기를 맞았다. NYT에 따르면 석유수출이 거의 유일한 외화획득 수단인 베네수엘라 경제는 올해 4% 쪼그라들 것으로 보이며 최근 사회보장에 관한 지출도 끊길 위기에 놓였다. 또 국제신용평가기관 피치는 베네수엘라의 외환보유액도 2008년 말의 절반 수준인 214억달러로 떨어지며 디폴트 위기가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남미의 우방 쿠바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택하면서 베네수엘라가 노선변경의 기로에 선 데도 저유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2004년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 결성을 주도하며 남미에서 좌파·반미동맹을 주도해왔다. 또 베네수엘라는 쿠바에서 의료지원 등을 받는 대가로 매일 10만배럴을 쿠바에 지원하며 경제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저유가가 심화되며 베네수엘라 경제가 휘청이자 양국의 정치적·경제적 유대관계에도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과 핵협상을 벌이고 있는 경제제재 대상국 이란 역시 저유가로 위기를 맞았다. 이란이 내년에 균형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유가 수준은 배럴당 130달러. 하지만 내년 유가가 배럴당 70~80달러선에서 형성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심각한 재정위기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모하메드 레자 사브카리푸어 이란 무역센터장은 최근 현지언론인 트렌드에이전시와의 인터뷰에서 "내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최소 30%에 이를 것으로 보이며 50%를 넘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란과 미국을 비롯한 주요6개국의 핵협상에도 불리한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이란은 러시아·중국이라는 경제적 지원군을 핵협상의 지렛대로 써왔지만 러시아가 저유가 여파로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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