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미지 과잉의 시대이건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이 그리운 시대'다.
사진과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종 멀티미디어의 발달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뛰어넘게 했고 디지털 영상기술은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를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미술계에서는 오히려 뉴미디어와 대규모 설치작업이 주를 이루면서 오히려 이미지의 대표격이던 '그림(painting)'을 주변부로 밀어냈다. 이에 대한 반작용처럼 최근 몇 년 새 유럽 등을 중심으로 회화 부흥운동이 일었다. 2013년 독일 베를린에서 '페인팅 포에버', 영국 테이트브리튼미술관에서 '페인팅 나우' 등 대규모 회화전이 열린데 이어 지난해에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더 포에버 나우'라는 제목의 회화 기획전이 관심을 끌었다.
태평로 소재 삼성미술관 플라토는 이같은 세계적 추세를 반영해 현대 회화의 흐름을 짚어보는 '그림/그림자-오늘의 회화'전을 19일 개막한다. 주목받고 있는 국내외 차세대 화가(畵家) 12명의 작품 35점을 통해 현대미술에서 '그림'이 갖는 의미를 재조명하는 자리다.
미국작가 헤르난 바스(38)는 어린 소년들 사이의 성적 긴장감과 혼란을 표현했던 초기작 이후, 최근작에서는 데카당스(퇴폐적) 문학과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드러낸다. 보름달이 뜬 정원에 앉은 남성을 그린 '달빛정원의 알비노'는 규정할 수 없는 시공(時空)에 놓인 인간과 그를 둘러싼 자연을 바라보게 한다.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됐던 영국의 리넷 이아돔-보아케(38)는 마네·세잔 등 거장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암시하며 서양미술사의 초상화 전통을 보여주지만 허구적 인물을 통해 그가 '발언하고자 하는 것'은 모호하다.
인상주의부터 신표현주의까지 미술사의 거의 모든 시대를 차용해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낸 미국의 데이나 슈츠(39)는 각종 이미지의 조합으로 일종의 불협화음을 그려낸다. 폴란드 출신 빌헬름 사스날(43)의 어딘지 모를 공간의 뜬금없는 풍경도 작가만이 아는 비밀인 듯 궁금증을 유발한다. 이들 작품을 뭉뚱그려 "뭘 그렸는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불평할 수도 있으나, 그림의 내면을 비춰낸 창(窓)인 만큼 마음을 마음으로 읽는 태도면 충분하다. 감상자가 내키는대로 보고 해석하더라도 문제 될 것 없다는 얘기다.
한국작가로는 스냅사진을 그림으로 옮기며 흘러가는 시간성에서 뽑아낸 '일시성'을 탐구하는 박진아(41)와 음악·연기 등 다양한 예술영역을 넘나드는 백현진(43)이 참여했다. 정물화·풍경화 등에서 시대 역행적(?)인 보수성을 보여주는 질리언 카네기(44), 사물에게서 느낀 본능적 인상을 그리는 조세핀 할보슨(34), 역사적 소재를 그리지만 정치적 발언을 회피하는 중국의 리송송(42) 등이 짙은 여운을 남긴다.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불친절'하지만, 그림이 종교와 정치권력의 도구에서 벗어나 작가 감정에 충실한 표현수단이 된 이래로 조분조분 친절하게 설명해 줬던 적 없었음을 감안하면 받아들일 만하다. 전시제목은 회화의 죽음이 언급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들여다 본 회화의 기원에 대한 야심찬 포부를 담고 있다.6월7일까지.1577-7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