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도약하는 건설코리아] 영욕의 해외건설 41年史

泰고속도로공사 첫 테이프…1997년 140억弗 사상최대


우리나라의 해외건설시대를 연 첫 공사는 현대건설의 태국 파타니~나랏티왓 고속도로 공사다. 낙찰가액은 522만달러에 불과했지만 올해 해외건설 누적수주액 2,000억달러 돌파의 밑거름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 받을 만 하다. 이후 국내 건설업체들은 리비아 대수로,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타워, 아랍에미리트 버즈두바이타워 건설공사 등 세계 건설사에 남을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수주한다. 1965년부터 1974년까지 10년간은 우리나라 건설기업들이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주무대로 활동영역을 넓히던 개척기다. 이 시기엔 그 동안 국내 군납건설공사와 차관건설공사를 통한 경험 축적, 건설외교, 건설인력 확보 등을 통해 동남아 시장을 어렵게 개척할 수 있었으며 베트남전에 우리나라 군이 참전하면서 군관련 공사에서 특수를 누렸다. 우리 기업들이 눈을 돌려 중동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1975~1983년은 확장 및 성숙기다. 중동 붐에 편승해 본격적인 양적 팽창이 이뤄진 시기다. 2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중동 산유국들은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이자 우선 인프라 건설에 착수했고 이에 따라 외국인력ㆍ기술ㆍ물자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다. 우리나라의 해외건설 수주액은 1976년 한해 동안 25억달러를 넘었고 마침내 1981년에는 137억달러로 사상 최대액을 기록하는 등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80년대초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해외건설 강국으로 등장했고 이후 3년간 우리나라 해외건설은 매년 100억달러 이상의 높은 수주고를 달성하면서 진출시장도 세계 전역으로 다변화되는 등 해외건설 황금기를 맞았다. 1984~1992년은 우리나라 해외건설산업의 최대 위기로 분석되는 침체기다. 1981년 한때 최고조에 달했던 해외건설 수주는 1984년부터 급감하기 시작, 88년에는 해외건설 진출 초기를 제외하고는 사상 최저치인 16억달러를 기록했다. 이 같은 수주 감소는 유가하락→산유국 석유판매수입 감소→중동국가 사회간접자본 건설 마무리에 따른 발주물량 감소라는 외적 요인과 함께 해외건설기업들의 기술적 한계성 및 대체시장 발굴 미흡 등 내부요인, 국내 건설노임의 급상승 등이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침체기를 겪은 우리기업들은 1993~1997년 고부가가치의 중동과 동남아에서 플랜트공사를 따내면서 재도약의 기회를 잡는다. 연간 수주액은 1995년을 제외하고는 70억달러를 상회했으며 1996년에는 108억달러를 수주, 1980년대의 절정기 수준에 육박했다. 특히 동남아 외환위기 발발시점인 1997년에는 우리나라 해외건설 역사상 최대 수주액인 140억달러를 기록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1998~2003년은 동남아 외환위기와 우리나라의 IMF사태 여파로 해외건설이 조정기로 접어들었다. 당시 주력시장이었던 동남아 건설시장은 급속히 냉각됐고 우리나라에 대한 IMF 구제금융 단행은 국가신인도 저하, 금융기관과 기업의 신용도 하락으로 이어져 보증발급 및 시공자금 조달 등 금융 애로요인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때는 고부가가치산업인 플랜트가 해외건설공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해외건설은 2004년 75억달러를 수주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지난해에는 109억달러를 수주, 1997년 동남아 및 우리나라 외환위기 이후 8년만에 100억달러 고지를 넘어서 제2의 중동특수를 구가하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지난 7월까지 역대 최단기간 100억달러를 돌파라는 기록을 세우며 활황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최근 플랜트 공사의 비중이 70%대를 육박하는 가운데 도약기에 급증했던 투자개발형 프로젝트가 다시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성공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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