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흥은행이 1일 국내 최고(最古)인 109년 역사를 접는다. 외환위기 이전 부동의 1위 은행으로 자리잡으며 은행권의 맏형 역할을 해오던 조흥은행은 이날로 간판을 내리고, 신한은행에 합병돼 존속법인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즉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의 역사마저 흡수한 것이다. 조흥은행은 우리나라 금융사에 남긴 기록이 많다. 조흥은행은 구한말인 1897년 2월 창립된 한성은행으로 출발, 국내 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금융업체로 기록됐다. 조흥은행은 제1호 상장기업, 은행권 최초의 복권 업무 주관, 금융권 최초의 노동조합 창설, 금융권 최초의 예금 온라인화, 최초의 인터넷뱅킹 실시 등 금융권의 숱한 최초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수 많은 금융제도와 시스템을 가장 먼저 창시한 역사와 전통에 힘입어 국내 은행 중 가장 대중적인 영업기반을 보유하고 있는 은행으로도 손꼽힌다.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은행인 조흥은행의 역사는 국내 금융권은 물론 대한민국의 영욕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조흥은행은 해방 직전인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통합으로 ‘조흥’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1945년 8월15일 해방과 동시에 국토가 분단되며 38선 이북의 평양ㆍ함흥ㆍ해주지점 등 12개점을 잃어 분단의 아픔을 겪었으며, 6ㆍ25 전쟁 이후 50.ㆍ60년대 국가경제 재건은 물론 70~80년대 수출경제 한국으로 성장하는데 든든한 맏형의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집안의 가장에게는 외풍도 심하게 불어 닥치는 법. 국내 1위의 은행이었기에 기업여신이 많을 수 밖에 없었던 조흥은행은 지난 82년 이철희, 장영자 부부의 어음사기 사건, 97년 한보사태, 삼미그룹 파산, 기아그룹 부도 등의 여파로 정부의 공적자금을 지원 받는 ‘부실 은행’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다시 살아날 기회가 있었으나 대우사태로 추가 부실이 터지며 지난 2003년 9월 신한금융지주에 인수됐다. 그리고 이제 24년 역사의 신한은행과 통합으로 자산 166조원, 지점 962개, 임직원 1만3,700명의 은행으로 다시 거듭나게 됐다. 조흥은행은 오래된 역사 만큼이나 금융권에서 회자되는 많은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지난 66년 12월 준공돼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광교 본점의 경우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인 18층에 최신식 에스컬레이터까지 갖춰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완공식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로서는 가장 높았던 이 건물 옥상에서 청와대 쪽을 바라보고 싶다며 옥상까지 올라갔지만 채 마르지 않은 시멘트에 구둣발이 빠져 은행 임직원들을 당황케 했다고 한다. 조흥은행의 마지막 행장으로 31일 퇴임한 최동수 행장(35대)은 “조흥은행의 마지막 행장으로서 아쉬움도 남지만 역사와 전통의 조흥은행과 함께 해서 상당히 보람이 있었고, 자랑스럽다”며 임직원들에게 “그 동안 잘해줘서 고맙고, 통합은행에서도 당당한 주역이 되어달라”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