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9월 15일] 고령사회와 묵은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묵은지이다. 묵은지를 넣어 푹 끓인 김치찌개, 묵은지를 곁들여 먹는 두부, 묵은지로 부친 전, 묵은지를 넣어 끓인 라면도 무척 좋아한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묵은 김치가 바른 표현이지만 묵은지라는 방언 섞인 신조어가 더 깊은 맛을 내주는 것 같다. 아무튼 그만큼 묵은지를 좋아한다. 나는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음을 많이 탄다.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 첫 만남만으로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편이다. 하지만 오래도록 만나 마음을 조금씩 열며 서로를 알아가다 보면 마음이 활짝 열리는 때가 온다. 인연도 생김치보다는 묵은 김치 같은 속 깊은 인연이 더욱 소중한 법이다. 관계가 묵은지처럼 잘 익어 깊은 맛을 내주는 때부터 평생을 함께 늙어가는 소중한 인연이 된다. 내 주위의 묵은지 같은 친구들은 그래서 늘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더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드신 주인공, 어르신이 바로 그분들이시다. 어르신들이 세월과 함께 쌓아온 경험과 지혜는 우리 사회의 품격이고 자산이다. 묵은지의 깊은 맛처럼 우리 사회에 그윽한 맛을 더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어르신들이다. 이분들의 희생 어린 삶에 대한민국은 빚을 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그 빚을 갚을 의무가 있다. 급속한 노령화에 따라 오는 2050년이면 우리나라는 전체인구 대 노인인구 비율이 세계 최고인 '최고령국가'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노인인구가 전인구의 38.2%인 1,616만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들의 미래는 밝지 않다. 급속한 고령사회를 대비해 미리 사회적 인프라를 마련해둬야 하나 현재 우리사회는 노인복지정책과 소득보장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 준비가 거의 돼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노령화와 그 대책에 대한 정치적ㆍ사회적 논의가 시급한 이유다. 고령 사회를 대비하는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양질의 노인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노인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건강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선심성 용돈주기식 일자리가 아니라 그분들의 경륜과 지혜를 활용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정치권과 사회가 시급하게 나서야 할 시점이다. 묵은지와 같은 음식을 일컬어 슬로푸드(Slow Food)라고 한다. 음식을 조리하고 먹는 과정에 긴 시간이 필요한 음식이 곧 슬로푸드다. 긴 시간 정성스레 발효시켜야만 맛볼 수 있고 건강에도 좋은 음식이다. 맛이 좋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인들이 쌓은 경험과 지혜는 우리 사회의 슬로푸드와 같은 존재다. 우리 사회에 깊은 맛을 불어넣어주고 또 한층 건강하게 해주는 사회의 슬로푸드. 하지만 그분들을 위한 우리의 움직임이 결코 슬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